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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운동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와 프란시스 윌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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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5-28 조회수 1,663

<세계 기독교 여자 절제회와프란시스 윌라드>


1. 세계 기독교 여자 절제회의 설립


1. 미국 기독교 여자 절제회(the National 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WCTU)의 시작

1873년 12월 미국 뉴욕 주를 시작으로 동부 및 중부 지방의 여성들이 술집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술집 앞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거리로 나섰던 여성들은 술집 주인들에게 남편들과아들들에게 술을 팔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비폭력적으로 진행된 이 운동이 여성 십자군 운동(Woman’s Crusades)의 시작이었다.

남북 전쟁 이후 음주는 미국의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특히 도시에서의 음주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은 그 해결 방안으로 절제운동을 제시했다. 

절제운동가들은 강연 등을 통해 술의 위험성에 대해 계몽했고, 기독교 여성들은 지역 술집 안팎에서 무릎을 꿇고 술을 포기하도록 기도하며 술집 문을 닫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동부에서 시작된 노력들은 일단의 성공을 거두었다. 술집 주인들은 가게를 닫았고, 손님들은 절제 서약에 서명했다. 

이와 같은 여성들의 행동으로 술 판매가 중지되었다는 소식은 이내 전국으로 퍼졌다. 

미국 중서부 전역에서 조용히 가정을 지키던 여성들이 일어났다. 

이 여성들은 마약상, 호텔 소유주, 술집 주인을 고발하고, 술 판매를 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이 여성십자군 운동은 250개 마을과 도시에서 알코올을 몰아냈다. 

운동이 끝날 때쯤 에는 31개 주 900 여 지역에서 영향력이 발휘되었다. 

전국적으로 750개의 양조장이 문을 닫았고, 수천 명의 여성들이 이 운동으로 힘을 얻었다. 

그리고 이 일은 여성들이 공적으로 일어선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여성십자가운동의 영향력은 일정 기간 동안만 유효했다. 

주류 업체들이 다시 판매를 시작하자 여성들은 조직을 결성하기로결정했다. 

그 결과 1874년 11월 18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전국 여자 기독교 절제회(National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NWCTU)가 설립되었다. 

NWCTU는 여성들만으로 운영되는 최초의 조직이었으며, 초교파적이면서도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였다.  

 NWCTU의 출범 이유 중 하나는 기존의 절제운동에서 여성들이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남성 주도의 절제운동은 법률 개정에 소극적이었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기를 희망했다.

남성들은 술을 제한된 범위에서 거래되길 원했으나 여성들은 모든 술 제조 및 허가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여성 활동을 극대화 하기 위해선 독자적인 단체가 필요했다. NWCTU가 선정한 기본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알코올의 악영향에 대해 미국인들을 교육한다.

  두 번째 알코올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입법화하기 위해 활동한다.

  셋째 이 목표를 위해 전국의 여성들을 조직화한다.

 

1879년에는 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Willard)가 제 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미국 내 가장 유명한 여성이었던 윌라드는 1890년대까지 NWCTU를 제일 크고 영향력  있는여성 단체로 성장시켰다. 

현재 NWCTU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 조직으로서“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린도후서 7:1)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술, 불법 마약, 담배를 완전히 금하도록 교육하는 

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선언하며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2. NWCTU의 확장과 제 2대 회장 윌라드의 비전  

NWCTU는 1875년 신시네티에서 열린 제 2차 회의에서 미국이라는 경계를 넘어 성장하기 시작했다. 

NWCTU의 운영방법을 배우기 위해 레티시아 요만스(LetitiaYoumans)가 캐나다에서 참석했고, 이후 요만스는 캐나다 여성들의 조직화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1876년 1월에는 NWCTU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튜어드(Eliza Steward) 가 영국으로 초청되었다. 

그녀는 6개월 간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연이어 회합을 가졌고, 세계절제운동 관련 단체구성을 논의한 결과 1876년 4월 21일 영국 여자절제회가 탄생했다.

캐나다와 영국 등 미국 외 지역에 여자절제운동의 영향력이 발휘되는 가운데 WCTU의 2대 회장이었던 

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Willard)는 1883년 샌프란시스코의 아편 방(opium den)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녀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연안과 극동 지역은 바다를 통해 우리 아름다운 영토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미혹되었다는 점에서 인류는 하나입니다. 

화이트 리본 여성들의 사명은 평화와 순결을 위해, 가정을 보호하고 높이기 위해 이 세계의 모성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 넘어 있는 우리 자매들과 형제들을 향해 분명히 목소리를 내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 여성들을 조직하는데 화이트 리본 여성 선교사들의 사명을 강조한데 이어 윌라드는 1883년

10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NWCTU 총회 정기 연설을 통해 여자절제회의 세계적 조직화의 필요

성을 역설했다. 

그녀는 이 회의가 위대한 도약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자매님들, 저는 마약 중독과 관련하여 한 가지 계획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올 한해 있었던 많은 일들 중에서 제가 특별히 고심했던 연구의 결과입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의 마약 방들을 방문했었습니다. 

마약 중독의 결과를 목도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알코올로 인한 광란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냈고, 가정은 더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그간 동양에 계신 선교사님들께서는저에게 그리스도 군사의 위대한 절제 사역이 인도, 중국, 일본의 도시들 그리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유럽 대륙을 여행 중인 코네티컷 지부 회장인 트레드웰 여사의 편지는 파리의 

지도자 목사님들이 여자 절제회가 전 세계 대도시들 가운데 조직되기를 열렬히 바라고 계신다고

 저에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우리 영국의 동역자들께서 지경과 바다를 건너 정성을 다해 이 운동에 협력해 주시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제 여자기독교 절제회(International 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를 

결성함으로서 우리가 고대하는 시대의 도래를 자매님들에게 촉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국제 여자기독교 절제회는 지구를 하나로 묶어 약물 중독에 대해 동양과 서양이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번 총회에서 이 운동의 첫걸음을 재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1-2년 간 이 사역은 전적으로 서신과 언론을 통해 수행될 것입니다. 

아직은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저는 오늘 우리 모임의 명망이 이 찬란한 사업을 예비하는 도약의 토대가 되기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이와 같은 윌라드의 비전에 고무되어 NWCTU는 해외로 눈을 돌려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상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결과 1883년 세계 기독교 여자 절제회가 탄생했다.   

 

2. 세계 기독교 여자 절제회World 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1. 1883년 WWCTU의 창립과 선교사 파견

여성운동의 세계적 조직화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NWCTU와 윌라드는 1883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World 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WWCTU)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으로 잉글랜드의 마가렛 브라이트 루카스가 임명되었다. 

1890년 루카스의 별세로 1891년 제 1회 세계 총회에서 프란시스 윌라드가 두번째 WWCTU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보스턴에서 열렸던 이 회의에는 영국, 캐나다. 하와이, 일본, 케이프 식민지, 태국, 버마, 인도, 

프랑스, 뉴펀들랜드, 스페인, 이태리, 시리아, 스리랑카 등 14개 국 대표들이 참석해 세계적 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WWCTU의 설립과 활동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메리 리비트(Mary ClementLeavitt)가 첫 번째 세계 순회 선교사 및 조직가로 임명되었는데, 그녀는 1878년 윌라드를 만나 절제운동애 참여하고 있었다. 

전 세계를 순회해야 하는이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인 그녀는 1884년부터 7년 동안 97,308 마일을

 여행하면서 6,623개의 각국 절제회(WCTU)를 만들었고, 228명의 통역사들과 함께 47개 국어로

 소통하면서 절제운동을 전파했다. 

뒤를 이어 헌신된 여성들이 리비트의 발자취를 따랐다. 

1888년 뉴욕 시에서 열린 총회에서 제시 에커만(Jessie Ackermann)이 두 번째 세계 순회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역했는데, 여러 아시아 나라들도 방문했다.

1890년에 임명된 케이트 부쉬넬(Kate Bushnell)박사와 엘리자베스 윌러 앤드로(Elizabeth Wheelar Andrew)는 주로 인도에서 사역하고 봉사했다. 

엘레스 R. 파머(Alice R.Palmer)는 1891년 임명되자 곧 남아프리카로 떠나 2년 동안 사역했다.

1893 년 시카고에서 열렸던 두 번째 WWCTU 총회에는 13개국 40 명의 대표자가 참석했다. 

기존 임원들이 재선출되었고, 5명의 화이트 리본 선교사들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22개국 대표들이 참석했던 1897년 제 4차 총회에서는 WWCTU의 정관을 “인종이나 색깔의 구별없이”라는 구절을 포함하는 것으로 수정함으로써 세계적 조직으로서 지도적 시각을 제시했다.  

1903년 제네바에서 열린 제 6차 총회에서 외국 사역자들의 명칭이 “세계 화이트 리본 선교사들”(World’s White Ribbon Missionaries)로 

변경되었고, 동 총회에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영국 출신 9명의 선교사들이 임명되었다. 

한국기독교 여자 절제회 창설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크리스틴 틴링(Christine Tinling, 

영국) 선교사도 이 총회에서 임영되었다.

절제회의 세계 선교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선교사들은 40여 개 국을 여행했고, 방문했던 대부분의 나라에서 절제회가 조직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전 세계의 억압받는 여성들을 향한 윌라드의 깊은 뜻이 1880년대의 수많은 절제회원들에게 전달되었다.

 

2. 다국적 언어 청원서(The Polyglot Petition)

1883년 총회에서 세계적 여성조직의 설립을 제안한 후 곧바로 윌라드는 다국적 언어 청원서(The Polyglot Petition)를 작성했다. 

이 청원서는 최초의 국제 청원서로서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알코올 수송과 아편 거래 반대를 요청하는 과감한 시도였다.  

사실 청원은 이전부터 WCTU가 반복해서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더라도 정부 기관에 제출되는 결의안에 서명함으로써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879년 윌라드는 입법자들이 가정 보호 발의안 상정을 위해 17만 명 이상의 이름이 적힌 청원서를 일리노이주 하원에 제출했었다. 

발의안의 내용은 여성들로 하여금 알코올 판매를 지역적으로 제한하는 등의 문제에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윌라드의 지휘 아래 WWCTU는 1884년 다국적 언어 청원을 시도했다.

WWCTU 최초의 세계 순회 선교사로 활약했던 리비트에 의해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이 청원서가 전해졌다. 

리비트는 하와이의 샌드위치 섬 방문을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을 방문하며 WCTU 결성 사역과 함께 다국적 언어 청원서도 함께 전달했다. 

최초 5명의 WWCTU 선교사들을 포함, 절제회 세계 선교자들은 방문하는 모든 나라에서 정부에 의해 술과 아편의 판매가 금지되기를 바라는 세계인들의 서명을 수집했다. 

그 결과 49개 언어로 작성된 이 청원서에는 총 50여 개국 750만 명이 넘는 성인 남녀의 서명이 실리게 되었다. 

이 거대한 청원서는 1891년 보스턴에서 열린 제 1회 세계 WCTU 회의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가정 보호를 위한 다국어 청원은 범죄 금지에 대한 내용 뿐 아니라 여러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이 청원서는 주류와 마약의 제조 및 국제 무역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계 최초의 선언이었다. 

두 번째 이 청원서가 아편과 그  파생물의 통제에 대한 국제적 합의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첫 번째 주요 캠페인이었다. 

또한 이 청원서는 당시 여성들에 대한 이해와 사명 그리고 법률에 대한 기독교적 요구를 강조하고 있었다. 

아시아 여성들이 극도의 천대를 받고 있다는 윌라드의 확신은 서구 여성들로 하여금 세계의 억압당하는 여성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음은 윌라드가 작성한 다국적 언어 청원서의 도입부이다.  

우리 청원자들은 육체적으로 약한 성별에 속해 있지만 우리 가정과 고국과 전세계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강합니다. 

우리는 맑은 두뇌와 맑은 마음이 정직한 삶과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이로써 나라들이 번영하고 세계가 평화롭게 될 때가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나라의 여성대표들의 단결 된 목소리로 여러분에게 법률의 기준을 기독교 

도덕 수준으로 높이고, 알코올 거래와 아편 거래에 있어 국가의 안전장치와 재개를 제거해주셔서

 여러분의 정부가 관장하는 모든 영토에서 이러한 문명에 대한 저주를 완전히 금지함으로써 

우리 가정을 보호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3. 여성 참정권 운동

윌라드의 절제운동은 금주가 중요 목표였지만 동시에 윌라드는 여성들이 투표라는 무기를 가지고 음주로 인한 가정 파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리노이 주 NWCTU의 회장이 된 윌라드는 그 일들을 감당하며 전국 NWCTU의 회장으로 선출되기에 충분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1879년 윌라드는 NWCTU의 두 번째 회장으로 당선되었고,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는 윌라드의 재능과 넓은 시야는 이 젊은 조직을 새롭게 변신시켰다.

초대 회장이었던 위텐마이어(Annie Wittenmyer)가 여성참정권을 NWCTU의 임무에 포함시키려는 개념에 반대했었다. 

반면 2대 회장 선거에서 승리한 윌라드는 금주라는 기본 목표를 견지하는 가운데 여성 참정권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윌라드는 회장으로서의 첫 연설에서 절제운동은 여성들이 반드시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인지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지도 하에 NWCTU는 절제를 실행하기 위해 정치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으로 방법을 전환했다.

사실 앞서 진행되었던 여성십자군 운동은 시민적 권리가 없었던 미국 여성들의 항의 방법이었다. 

여성의 무력함과 결합된 미국 남성의 음주는 가정에 대한 막대한 위협이었고, 알코올로 인한 아동과 아내에 대한 학대 및 여성에 대한 억압에 대해 여성들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거의 모든 지역 정치 회의는 여성이 배제된 채 술집에서 열렸다. 

19세기 후반 여성들은 투표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주에서 기혼 여성은 남편의 정체성에 포함된, “법에 대해서 죽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피해자였던 미국의 여성들에게 절제운동은가정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돌파구가 되었다. 

윌라드는 NWCTU의 지도자로서 술로 대표되는 심각한 사회적 악에 대한 최전선에 여성참정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서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윌라드는 여성이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가정보호”라는 슬로건 아래 궁극적으로는 알코올의 국가적 금지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NWCTU가 여성참정권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드디어 윌라드의 지도 하에 NWCTU는 여성이 주류 금지 법안에 투표할 수 있도록 여성의 투표권을 촉구하게 되었다. 

NWCTU는 여성 참정권 개정 요청의 전 단계로 꾸준히 대규모 청원을 추진하면서 주류 금지를 위한 지역 옵션 투표에의 참여를 요청했다. 

또한 초교파 여성 기독교 조직으로서 NWCTU는 절제를 추진하는 수단으로서 여성의 투표를 지지해 달라고 개신교 교회들을 설득했다. 

이제 참정권과 절제는 같은 쟁점의 두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윌라드는 여성들이 가정에 대한 헌신과 공적인 일 사이에서 절제라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가정에 메이도록 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평등한 권리를 찾도록 해 주었다. 

윌라드는 가정생활을 강조함과 동시에 공적인 삶을 여성들의 영역으로 삼고, 여성이 사회 참여를 조직화하는 일에 다른 여성들도 동참하도록 독려했다.  

윌라드의 지도력 아래WCTU는 한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있던 조직에서 “모든 것을 한다”(Do everything)를 모토로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20 여 만 명의 여성 네트워크로 발전했고, 동시에 여성들 자신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919년 미국은 헌법 18조 수정안을 비준해 금주법을 제정했다. 

주류의 양조, 판매, 운반, 수출입의 금지가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1920년에는 각 주(State)에 따라 점진적으로 실현되어 오던 여성참정권이헌법 수정안 제 19조의 통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수정안에서는선거를 할 수 있는 미국 시민의 권리가 미합중국이나 어떠한 주에서도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함으로써 NWCTU의 오랜 싸움은 승리했다.    

 

4. 최초의 여성 참정권 획득: 뉴질랜드 기독교 여자 절제회

세계 최초의 여성참정권은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의 여성들에게 주어졌다. 

1893년 이루어졌던 이 역사적인 사건의 중심에는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가 이끄는 뉴질랜드 기독교 여자 절제회 (NZWCTU)가 있었다.

뉴질랜드 기독교 여자 절제회의 설립은 당시 미국 기독교 여자 절제회(NZWCTU) 세계 순회 선교사였던 리비트의 뉴질랜드 방문으로시작되었다. 

전 세계를 순회하며 각국에 절제회를 설립하고, 다국적 언어 청원서를 전달했던 리비트는 1885년

 뉴질랜드를 방문했고, 케이트 셰퍼드와 함께 뉴질랜드에서 기독교 여자 절제회를 설립하고 

금주운동을 펼쳤다. 

당시 셰퍼드는 교회 사업에 열정을 쏟고있던 재능있는 청년 활동가로서 뉴질랜드 교회 여성연합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었다.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NZWCTU를 조직하고, 지도자가 된 셰퍼드는 알코올과 이혼, 각종 성적 억압과 착취 등의 문제를 여성적 관점에서 풀어 나갔다. 

투표권의 부재는 눈에 보이는 차별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그녀의 관심은 여성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셰퍼드는 미국 NWCTU의 설립과 참정권과 관련된 윌라드의 권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윌라드가 “여성들이 전투를 위해서 탄환과 같이 투표권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예측하고 여성참정권을 위해 ‘가정 보호’ 논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금주 운동을 펼치던 NZWCTU 셰퍼드의 리더쉽 하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셰퍼드는 1887년 NZWCTU 참정권 부장으로 지명되어 이 싸움을 이끌었고, 이후 여성 참정권 투쟁에 헌신했다.

보통선거가 일반화되고 나서 독립한 나라들을 예외로 한다면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여성들의 강력한 요구없이 여성 참정권이 실현된 역사는 없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주장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셰퍼드는 "모든 종류의 차별 즉 인종, 계급, 신념과 성별에 따른 차별은 비인간적이며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1888년엔'뉴질랜드 여성이 투표해야 할 이유'라는 팸플릿을 만들며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절제회의 활동이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면서 셰퍼드는 힘있는 연설과 조직 운영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개진했다. 

금주와 여성참정권의 필요성에 대해 계몽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사람들을 일으켰고, 탄원했다.

지적으로 열등하다거나정치적인 판단을 내릴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여성에 대한 구시대의 편견 외에 셰퍼드가 견제를 당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들이 더 있었다. 

술에 대한 금주를 주장했던 셰퍼드와는 달리 다른 많은 남성 정치인들은 알코올 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류 업계는 당시 강력한 로비 집단 중 하나였고, 의회는여성 단체의 의견을 묵살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 가운데서 셰퍼드는 여성참정권 운동의 필요성을 다시금 절감했다.

셰퍼드의 첫 의회 청원은 여성의 술집 종업원 고용 금지와 청소년 술 판매 금지였다. 

계속해서 NZWCTU는 1888년 처음으로 여성 투표권 도입을 의회에 정식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의회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NZWCTU는 1891년 9천 명의 서명이 담긴 첫 번째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 청원서가받아들여지지 않자 1892년과 1893년 잇달아 청원서를 제출했다. 

1893년 제출한 청원서에는 뉴질랜드 거주 유럽 성인 여성 인구의 4분의 1에 가까운 3만 2천 여명의 서명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청원서가 받아들여지면서드디어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법안이 찬성 20, 반대 18로 통과되었다. 

1893년 9월 19일 총리가 법안에 서명하면서 뉴질랜드 여성들은 세계 최초로 참정권을 획득했다.

이어 1919년에 여성에게 피선거권이 주어졌고, 1933년에는 최초의 여성의원이 탄생했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을 셰퍼드는 1925년 “뉴질랜드에서 우리는 어떻게 여성 참정권을 획득했는가”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보여주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 싸운 어제의 여성들이 바쳤던 그 용기와 헌신, 믿음과 자기 희생을 앞으로의 더 큰 일을 위해서 바칩시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투표할 권리를 쟁취했습니다. 

그 투표권을 써서 하나님과 가정과 인류를 위해서 더 큰 승리를 얻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라고 밝히며 

뉴질랜드 여성 참정권 획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정과 인류를 위한 더 큰 일을 

위한 수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과 가정과 인류를 위해 해내야 하는 사명이 여성들에게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4. WWCTU 와 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E. Willard (1839-1898)


1. NWCTU 이전의 윌라드

1880년대 “성 프란시스”와 “절제의 여왕”이라고 불렀던 프란시스 윌라드는 1839년 뉴욕주 쳐치빌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2살이 되던 해 쳐치빌을 떠나 이후 위스콘신에 정착했다. 

외딴 농장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윌라드는 1858년 온 가족이 이주한 일리노이 주 에반스턴에 

있는 노스웨스턴 여자대학(The North Western Female College)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이는 1850년대 미 중서부를 휩쓸었던 소녀들을 위한 학교 설립 운동의 영향이었다.

졸업 후 윌라드는 몇몇 소녀들을 위한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 즈음 결혼하지 않고 소녀와 여성의 교육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19세기는 직업과 결혼 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시기였고, 윌라드는 자신의 삶을 교육와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는데 바치기로 결정했다.

1870년대 윌라드가 교사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던 즈음 에반스턴의 한 여성 그룹은 

노스웨스턴 여자대학을 완전한 대학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업그레이드를

 수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스웨스턴 대학과 합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871년 윌라드가 노스웨스턴 대학 내 여자 대학의 총장으로선출되었다. 

윌라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학 총장으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이 되면서 교육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당시 언론은 이것을 환영하며 “우리는 여성이 권위있는 명칭인 ‘총장’으로 존귀함을 받는 것은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라 믿는다”고 보도했다.  

 

2. NWCTU와 여성 운동의 지도자    

1874년 윌라드는 그녀의 삶을 새롭게 설계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교회와 거리,국가의 입법부 청사에는 전투적이며 힘에 넘치는 여성들의 절제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870년대 미 중서부를 뒤흔든 이른바 “여성십자군 운동”이 끝날 무렵 일군의 여성들이 주류 절제를 촉구하는 국가 조직을 만들기 위해 기독교 여자 절제회(NWCTU)를 창설했다. 

윌라드는 이전 여성십자군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874NWCTU가 조직되자 즉시 NWCTU에 합류하여 전국 NWCTU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윌라드는 이 여성들이 택한 길을 걷기로 선택했고, 마침내 그들의 방향을 지도하게 되었다.  

윌라드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선택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가정을 위협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모든 악에 대항하는 첫 기구로서 절제회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했고,  또한 절제회가 여성들을 교육하는 큰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제 그녀에게 주어진 일은 절제회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었다. 

윌라드는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와 안나 고든(Anna Gordon)과 만남을 통해 상호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9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의 대표자로서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던 무디는 1876년 시카고 

부흥집회에 윌라드를 초청하며 첫 만남을 가졌다. 

윌라드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무디는 자신의 순회전도 여행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고, 

복음전도사로서의 삶에 대한 가능성으로 윌라드는 무디의 동역자가 되었다. 

강력한 신념과 뛰어난 재능으로 윌라드는 수 천명의 청중들을 불러 모았고, 마침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무디와의 동역은 길지 않았으나 그와의 활동을 통해 윌라드의 이름은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름들 중 하나가 되었다.

윌라드는 무디를 통해서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무디의 집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던 안나 고든이었다. 

복음주의자이자 절제운동가였던 고든은 이후 23년 간 윌라드와 함께 했으며, 남은 생애 동안 

금주운동을 위해 일했다. 

고든은 1914년부터 1925년까지 WCTU 회장으로 재직했는데, 절제회의 소망이던 미국 헌법 

수정안 제18조 금주 조항이 실현된 것을 목격한 이가 바로 안나 고든이었다.  

윌라드의 리더쉽을 언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여성 참정권 운동의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하이오 주에서 절제강연을 준비하던 1876년 봄 주일 아침 성경공부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집에 있을 때였다.

내가 머물고 있던 집의 노련한 십자군이던 안주인 방에서 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내 마음에, 내가 믿기로, 위로부터 선포하시는 말씀이 들렸다. 

‘너는 술의 횡포에서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성이 투표권을 가져야 함을 

외쳐라’ 그리고 나서 내 일생 처음이자 유일하게 내 뇌리에 논쟁과 실례의 완벽한 문장이 

번개 같이 떠올랐다.”

차츰 여성 투표권에 대한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1880년 보스톤 총회에서 

회장으로서의 첫 연설에서 윌라드는 절제운동은 지속적으로 여성들이 반드시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여성들에게 교육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윌라드가 NWCTU를 위해서 발명한 표어, “모든 것을 다 하라” 문자 그대로 그녀는 절제운동을 

통한 개혁을 많은 사회적 문제들과 연결시켜 다루었다. 

여성 참정권, 공립 유치원, 독립된 여성 감호소,남성의 성적 범죄에 대한 처벌 등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절제회 여성들과 노동운동을 연계시켜 1880년대를 특징지었던 실업과 경기침체, 

노동 쟁의에 개입했다. 

또한 윌라드와 절제회원들은 여성 단체 협의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윌라드는 미국과 세계 여성 단체 협의회를 영구적으로 조직한 위원회의 회장을 맡았고, 

1888년 회의 결과 조직된 미국 여성 단체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세계여성 단체 협의회가 윌라드가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다는 사실은 절제운동이 현 세계 여성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3. “하나님과 가정과 나라를 위하여”   

한 세기 전 미국에서가장 유명한 여성이었던 프란시스 윌라드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여성참정권자(Suffragist), 감리교 운동가(Methodist Activist), 기독교 사회주의자(Christian Socialist), 정치적 금지주의자(Political Prohibitionist) 등 다양하다. 

그러나 윌라드의 일생에서 그 모든 것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전 세계를 향한 여자기독교 절제운동에의헌신이었다. 

윌라드는 1879년부터 미국 여자기독교 절제회(NWCTU) 회장직을 수행했고, 1891년부터는 

세계여자기독교 절제회 회장직을 겸하여 1898년 소천하기까지 헌신했다. 

노스웨스턴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윌라드 전기는 1874년 여자기독교 절제회(WCTU)에 

참여함으로써 윌라드는 일생의 과업을 찾아냈다는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사망 기사는 그녀를 “빅토리아 여왕 다음으로“ “당대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윌라드는 19세기 신앙 부흥운동으로 촉발된 개인적 절제라는 화두를 사회 개혁과 

결합시킴으로써 기독교와 사회 개혁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고, 성공했다. 

윌라드가 강조했던 것은 “하나님과 가정과 나라”였다. 

그녀에 따르면 “사회와 국가라는 말하자면 더 큰 가정 속에서 여성들의 힘은 보편적인 평화와 

순결, 동포애에 입각한 통치를 이룩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었다. 

이처럼 윌라드는 절제운동을 전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미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기본적인 

역할에 도전하지 않았다.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여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녀에게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다.

이러한 그녀의 성향은 19세기 성공의 비결이라고 평가되었지만, 20세기에 그녀는 

잊혀질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절제와 가정 보호에 대한 강조 그리고 이러한 조합은 그녀를 19세기의 여왕으로 만들었으나 

20세기 중반에는 한낱 구세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절제는 더 이상 사회 개혁의 기초가 아니었다. 

약물 남용이 다시 강조되어야 할 이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주를 도덕적인 농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는 다시 “성 프란시스” 윌라드를 기억해야 할 때이다. 

알코올과 약물 남용의 위험은 절제를 다시 언급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알코올과 마약은 이제 여성에 대한 억압, 인종 차별과 같은 다른 사회 문제와 결합하고 있다. 

윌라드의 시대 WWCTU는 술의 통제 뿐 아니라 여성을 사회 및 법적 장애로부터 해방시켰다. 

나아가 일찍이 1897년 WWCTU 정관은 “인종이나 색깔의 구별없이”라는 구절을 포함하도록 개정되었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으로 개혁을 이끌었던 기독교 여성 절제 운동은 알코올, 마약, 가정폭력, 총기사고, 인종차별 등의 사회 악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 돌아보아야 할 모범이다. 

그리고 시작점은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여성의 책임 영역 즉 가정과 자녀 양육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던 윌라드의 가르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Gordon, Anna A (1898). The beautiful life of Frances E. Willard: a memorialvolume. Chicago, IL:Woman's Temperance Publishing Association. p. 150. Retrieved 20November 2020.

Willard, Frances. "Address Before the Second Biennial Conventionof the World's 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 Oct. 1893"Archives of Women's Political Communication.Iowa State University. Retrieved 20 November 2020

김정주. 편. 1993. 한국절제운동 70년사 (1923-1993). 서울: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루스, 보딘. 2016. 프란시스 윌라드. 한동수 옮김. 서울: (주) 대성 JCR.

장금현. 2004. 한국 기독교 절제운동 연구 (1884-1939년을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9190450833672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8/12/24222/

https://www.wctu.org/history

http://www.wwctu.org/pages/history.html

http://www.kwctu.org/2015_html/wwctu/sub5.php?main_menu=1&sub_menu=5

https://www.yna.co.kr/view/AKR20170913077000371https://en.wikipedia.org/wiki/Polyglot_Petitionhttp://www.nzc.co.kr/information/information_040100.html?bmain=view&uid=4&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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