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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최초의 의학 교육을 받은 조선 여성: 로제타 홀의 My girls

파일 mygirls.jpg       
작성일 2023-07-12 조회수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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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이 사랑한 ‘마이 걸스’-여메례, 노수잔, 박에스더(왼쪽부터) 1894년

내가 '내 아이들'이라고 부르며 병원에서 훈련시키고 있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로제타 홀의 일기, 1891년 1월

로제타 홀은 1891년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 ‘의료보조훈련반(Medical Assistance Training Class)’을 조직하고 이화학당에서 제일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에게 약물학과 생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에스더와 봉순, 수잔, 애니, 오와가가 그 대상이었다. 여기 여메례까지, 로제타는 이들을 '마이 걸스(my girls)'라 부르며 각별히 아꼈다. 이를 의학 교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녀들은 신체 외부 골격과 피부, 뼈에 대해 배웠고 직접 수술을 돕는 수준에 올랐다.

두 건의 구순구개열 수술에서 사라와 에스더의 도움을 받았다.

에스더는 이제 갈수록 용감해진다.

수술시 피를 잘 닦아내고 혈관을 누르는 지혈 겸자도 아주 잘 다룬다. (중략)

에스더는 한 손으로는 에테르 컵을, 또 한 손으로는 스펀지로 수술 부위의 피를 닦아내주었다.

로제타 홀의 일기, 1891년 4월 11일

로제타 홀에게 최초의 서양식 근대 의학 교육을 받은 대표적인 학생은 바로 점동, 훗날 최초의 조선인 여의사가 되는 박에스더다.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의 ‘마이 걸스’ 중에서도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의학 교육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타 홀은 ‘박에스더가 훌륭한 의사가 될 진정한 용기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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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김점동)와 남편 박여선

에스더는 뭐든 빨리 배우고, 환자들이 오면 내가 알아야 할

필수적인 질문들의 답과 증상을 미리 다 파악해놓는다.

아마 이 아이는 자신이 조선의 상황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로제타 홀의 일기, 1891년 3월 29일

로제타 홀이 사랑한 또 다른 소녀는 바로 여메례다. 여메례의 부모는 “이 아이는 집에서 키우면 일찍 죽는다”는 점괘에 겁을 먹고 아이를 스크랜턴 대부인(M. F. Scranton)에게 양녀로 보냈다. 여메례의 아버지는 한 남성에게 돈을 받고 아이를 첩으로 보내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로제타 홀은 여메례의 부모에 대해 ‘매우 무식하고 장점이라고 하나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로, 그들은 딸이 열두살 때 조선인 부자에게 첩으로 팔았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여메례는 스크랜턴 대부인이 설립한 기숙학교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세례를 받았고, ‘메리’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메례는 보구녀관을 찾은 환자를 예진하고 로제타 곁에서 수술을 보조하는 등 의료 보조 역할을 했지만, 간호사나 전도부인으로서의 역할에서 더욱 두각을 보였다. 훗날 여메례는 엄비(嚴妃)의 뜻을 따라 근대식 여학교 '진명여학교' 설립을 맡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어전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마이 걸스 중 한 명은 일본인이었던 오와가다. 1890년 한양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온 오와가는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3년 동안 이화학당에서 점동과 단짝이었던 오와가는 로제타 홀에게 꼭 필요한 도우미였다. 조선 소년들은 낮에 나들이를 다닐 수 없기 때문에, 낮에는 일본인인 오와가가 함께 다니며 통역을 했다.

로제타 홀은 "점동과 오와가를 진료소로 내려오라고 하여, 그램과 드램으로 무게를 재는 법, 미넴과 온스 측정하는 법, 가루를 만들고 나누는 법을 가르쳤다. 점동이가 수학을 이해하는 게 약간 빠르고 양의 계산을 잘하는 반면 오와가는 좀 더 깔끔하고 정확하게 해낸다"고 평가했다. 훗날 오와가는 결혼 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로제타 홀은 오와가와 나가사키에서 만나기도 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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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 시절 박에스더(김점동).1893

봉순은 어머니와 함께 이화학당에 들어온 소녀다. 딸은 이화학당 학생으로, ‘봉순오마니’는 보구녀관에 머물며 진료소의 보조와 전도사로 일했다. 과부였던 ‘봉순오마니’는 1891년 1월, ‘사라’라는 세례명을 받으며 드디어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여성이 됐다. ‘봉순오마니’는 이화학당에 근무한 이경숙과 함께, 자신의 능력으로 근대적인 교육 기관에 고용돼 급여를 받은 최초의 직장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노수잔은 미혼으로 보구녀관, 광혜여원 등에서 로제타 홀의 선교 사역을 도와주는 동반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로제타 홀이 사랑으로 가르친 귀한 소녀들은 훗날 조선인 최초의 여의사와 교육자, 종교인 등으로 성장했다. 로제타 홀은 조선 소녀들에게 배움과 의로움, 주체적인 삶을 선물했고 그 삶은 이화 안에서 큰 꽃을 피웠다.

[참고 문헌]

이화백년사 (이화여자고등학교, 1986)

닥터로제타홀(다산북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