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과 평양 연합기독병원에서 간호원 양성에 매진한 나오미 앤더슨 간호원장

개화기, 일제강점기 한국 땅에 들어와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살펴보면 부부, 형제자매, 부모자식 등 혈연 관계로 맺어진 이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당시 한국 땅에서 외국인으로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분명 녹록치 않았을텐데 그래도 내 가족이 같은 땅에서 함께 같은 일을 하고 있었음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살펴볼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3대 원장을 역임한 나오미 앤더슨(Naomi Almeda Anderson) 간호원장 역시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였던 오빠 알빈 앤더슨(Albin Garfield Anderson, 安道善)과 함께 30여년 가까이 한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1884년 10월 16일 미국 아이오와주 벌링턴(Burlington)에서 태어난 나오미 앤더슨은 1905년 시카고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도시, 가정,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수행할 선교사들을 교육시키는 기관이었다. 그녀는 1907년 6월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몬타나주 그레이트 폴스(Great Falls)에 위치한 몬타나 디커니스 병원 간호학교(Montana Deaconess Hospital School of Nursing)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고 1910년 6월 졸업하였다.

이후 앤더슨은 W.F.M.S. 노스웨스트지부 간호선교사로 인도 바레일리(Bareilly) 지역 병원 사역의 명을 받고 1910년 11월 19일 인도로 출발하여 1년여간 활동하던 중 한국으로의 이동이 결정되었다. 이에 1912년 1월 25일 서울에 도착하며 그녀의 남은 생애 대부분을 쏟아부은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앤더슨 간호사가 맡은 한국에서의 첫 사역은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책임자였지만 그녀가 한국에 첫 발을 내딛었을 시기는 정동 보구녀관의 대부분의 업무가 동대문의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으로 이전되고 있었으나 아직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이 완공되지 않아 여러모로 어수선한 때였다. 이에 앤더슨은 임시방편으로 평양 광혜여원에 가서 한국어를 배우며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의 진료 활동을 돕는 것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평양에서 두 계절을 보낸 앤더슨은 1912년 9월 함께 평양에 있던 간호원양성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에 와 스튜어트 의사와 함께 새 병원 개원 준비에 힘을 보탰다. 또한 간호원양성학교 수업도 다시 시작하였는데 1913년 봄 간호원양성학교에는 3학년 2명, 2학년 1명, 견습생 4명이 있었다. 1913년 3월 평양에서 졸업식을 마친 이희망 간호사도 바로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에 합류하며 앤더슨 간호원장의 조력자가 되었다.
정동에서 동대문으로 이전한 이후 첫번째이자 앤더슨 간호원장이 처음으로 주관한 간호원양성학교 졸업식이 1914년 5월 28일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과 맞닿은 동대문교회에서 진행되었다. 이날은 3명의 간호사가 배출되었는데 이경순, 이레나, 이메리가 그들이었다.

<1914년 간호원양성학교 졸업식 사진. 왼쪽부터 이레나, 나오미 앤더슨, 이메리, 스튜어트, 이경순>
앤더슨 간호원장은 스튜어트 의사와 더불어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개원과 안정적인 운영 정착을 위한 밑바탕을 만든 주역이었다. 특히 스튜어트 의사가 주력한 병원의 분만 사업과 유아 진료 사업은 앤더슨 간호원장이 양성했던 간호사들, 학생 간호사들의 협업하에서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한편 1914년 10월 조선총독부는 〈간호부규칙〉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간호활동을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에서 발급한 간호부 면허를 받아야했다.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총독부가 지정한 간호부 학교 또는 양성소를 졸업하거나 간호부 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외국인 간호사들에게도 이 면허가 요구되었다.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간호원양성소는 당시 총독부가 인가한 교육기관이 아니었기에 이곳의 졸업 간호사들과 간호선교사들은 총독부가 주관하는 간호부 시험에 응시해야만 했다. 1914년 12월 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제1회 간호부 시험이 치뤄졌고 이 시험을 통해 앤더슨 간호원장과 이희망, 이경순 졸업 간호사는 총독부가 발급한 간호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합격자 명단은 1914년 12월 29일자 《조선총독부관보》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명단을 통해 그간 선교사들의 기록에 영문으로만 기재되었던 Ye Hope, Ye Keung Sun이라는 간호사의 이름이 이호미(李好美), 이경순(李敬順)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앤더슨 간호원장은 4년 반 정도의 활동 후 1916년 6월 처음 휴가를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휴가 기간 동안 시카고 선교 연구소(Chicago Evangelistic Institute)에서 교육을 받고 1917년 가을 다시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으로 돌아와 1919년 3월까지 근무하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앤더슨 간호원장은 1921년 W.F.M.S.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선교 사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21년 9월 이제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견되어 평양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920년 평양에서는 기홀병원(감리교 소속)과 제중병원(장로교 소속)을 통합해 홀 기념연합병원(Hall Memorial Hospital)이 새로 출범하였는데 이 병원에 3년제 간호원양성학교를 신설하고 담당자로 앤더슨이 임명되었다. 이 병원은 1923년 광혜여원까지 합병하여 평양 연합기독병원(Union Christian Hospital)로 불리게 되었으며 간호원양성학교 역시 이곳에서 운영이 지속되었다. 이 간호원양성학교는 1931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이후 졸업생들은 별도의 시험없이 간호사 면허를 발급받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앤더슨 간호원장은 1927년 6월 휴가를 받아 미국에 가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했던 Gradwohl School of Laboratory Technology라는 학교에서 실험실 기술자(laborator technician) 교육을 받았는데 이 학교는 당시 의학 실험실에서 필수적인 기술과 이론, 오늘날로 치면 임상병리학 관련 내용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6개월 간 교육을 받고 이듬해 가을 평양으로 돌아온 앤더슨은 연합기독병원에서 자신이 새롭게 배운 것을 가르치다가 1940년 11월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에 따라 길었던 한국 선교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뉴욕의 Associated Mission Medical Office에서 실험실 기술자로 근무하던 그녀는 1943년 9월 가족들이 있던 시카고로 돌아갔다. 3개월 여간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앤더슨은 1943년 12월 30일 한국에서 함께 활동하던 에델 버츠(Ethel Butts) 간호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여 그레이스랜드 공동묘지(Graceland Cemetery)에 안장되었다.

앤더슨 간호원장은 쉽지 않은 해외선교활동 중 단비같이 만나는 짧은 본국으로의 휴가기간을 자신의 역량을 지속, 발전시키기 위한 배움의 시간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자신의 인생 2/3만큼의 시간을 한국에서 간호사 양성과 의료인 실험 교육에 바칠 수 있었다. 부족한 것을 채우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이를 자신의 일터에서 쏟아내는 일생을 보낸 나오미 앤더슨 간호원장의 삶은 당시 그녀에게 배우고 함께 활동한 한국인 간호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끊임없는 배움과 실천을 몸소 실행한 그녀의 헌신이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