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과 함께 동대문 언덕에 있던 동대문여자보통학교


이 사진은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장례 행렬이 흥인지문 옆을 지나가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고종의 대여가 흥인지문을 통과하려 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봉송하고 있다. 이 사진의 촬영자는 고종의 국장 행렬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이 사진을 찍었지만 이 사진 속에는 이화의료원과 관련된 중요한 건물들의 모습이 같이 담겨 있다. 바로 고종의 대여 뒤쪽 양 옆으로 보이는 2개의 건물이다. 왼쪽의 건물은 볼드윈 진료소이며, 오른쪽의 건물은 동대문 여자 주간학교(day school)이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건물들 위쪽 언덕에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동대문부인병원)이 위치해있다.
19세기 말 한국에 진출한 개신교 종파들은 공개적인 선교활동이 쉽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학교와 병원을 통한 간접선교 방식을 선택하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언더우드 고아원, 정동여학당, 시병원, 보구녀관 등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후 개신교 선교부에서는 자신들이 진출하는 지역에 교회와 함께 주간학교(매일학교, day school)를 설립해 교육활동을 통한 선교를 더욱 확장해갔고, 이들이 설립한 학교들은 한국 근대교육의 초석 역할을 하게 되었다.
주간학교란 학생들이 매일 학교를 통학하는 방식의 오늘날 일반적인 초등학교 형태를 말한다. 개신교에서 설립한 주간학교에서는 신도, 비신도를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 성경 뿐만이 아니라 한글, 사회, 미술, 음악 등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설립 초창기에는 정해진 연령대의 학생을 선발하여 번듯한 단독 학교 건물에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가지고 운영할 수는 없었다.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대부인이 1892년 동대문 옆 너른 언덕 부지를 매입해 볼드윈 진료소와 예배당을 마련했으나 이곳을 전담으로 맡아 운영하는 선교사가 지정되기엔 아직 한국에 감리교 여선교사들의 수가 부족했다. 이에 진료소는 보구녀관의 의사들이 정동과 동대문을 오가며 바쁘게 운영을 맡았으며 볼드윈 예배당 역시 서울 선교를 맡은 선교사의 몫이었다. 그러다 1898년이 되어서야 볼드윈 진료소와 동대문 지역 선교에 전담 선교사로 릴리안 해리스(Lillian N. Harris) 의사와 로드와일러(Luisa C. Rothweiler) 선교사가 배정되었다.
전담 선교사의 배정과 보조자들의 도움으로 동대문 구역의 운영이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며 주간학교의 설립도 추진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토대로 보면 동대문의 여자 주간학교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한국 최초의 간호사 중 한 명인 김마르다로 추정된다. 1890년대 중반 보구녀관 환자로 와 커틀러(Mary M. Cutler) 의사의 치료를 받은 후 보구녀관에서 조수일을 하며 간호의 기초를 배웠던 그녀는 전도부인 황메리와 함께 대기실의 환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다른 조수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등 일찍부터 교육 활동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동대문 여자 주간학교의 설립과 관련한 첫 언급은 1903년 W.F.M.S. 한국 연례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김마르다)는 또한 우리가 이곳에 온 이후로 열심히 노력해온 동대문 여자 학교를 설립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다음 해 이 여학교와 관련해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르다의 기도와 눈물, 그리고 수고의 결실인 소녀들의 학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어떤 작은 식물이 이렇게 돌밭에서 자라거나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마르다가 병원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적합한 교사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몇몇 소녀들은 한글 읽는 법을 배웠고, 여러 개의 작은 얼굴들이 예배 중에 밝게 빛나고 있다."
이처럼 동대문 여자 주간학교는 김마르다가 중심이 되어 1902년에서 1903년 사이 설치, 운영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볼드윈 진료소 대기실 한켠에서 소박하게 시작한 이 학교는 설립 초기 잘 갖추어진 수업 장소, 교사 등을 갖추지 못하여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05년 W.F.M.S. 한국 연례보고서에서는 이 학교가 해산되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1906년 1월 언스버거 의사는 학교를 담당할 교사를 구해 볼드윈 예배당 공간에서 주간학교를 재개하였다. 1932년 발간된 《조선교육대관》, 1936년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이 학교의 개교를 1906년 9월로 기록하고 있다.
주간학교는 이후에도 몇 년간 전담 교사 부재와 잦은 공간의 이동 문제를 겪었으나 1911년 경부터는 이화학당 졸업생이 학교의 책임자로 오고 1910년에 완공된 동대문교회의 지하실 방을 학교 공간으로 배정받으며 안정적으로 학교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단독 학교 건물 마련이라는 숙원사업은 1915년 드디어 이루어졌다. 500달러를 들여 종로 6정목(현 종로 6가) 72번지 동대문 언덕 초입에 학교 건물을 지었는데 이 건물이 바로 고종 인산일에 찍힌 그것이다. W.F.M.S. 본부에서는 이 학교 건물의 가치를 설립 이후 1922년까지는 1,200달러로 기록하고 있는데 1923~4년에는 2,000달러, 1925년부터는 2,500달러로 기록하고 있다. 또 East Gate School이라고 쓰던 건물명을 1925년부터는 East Gate Gamble Memorial School이라고 변경 기재하였다. 학교의 증축과 관련한 기록은 현재 1925년 8월 6개의 교실을 증축하였다는 것 밖에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1919년 찍힌 사진에 담긴 건물 뒤쪽으로 학교 건물이 확장된 것을 볼 수 있고, 건물의 가격 변동으로 보아 1920년대 중반 교사의 증축이 있었고 Gamble이라는 사람 혹은 기관의 후원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빨간색 박스 안이 동대문여자보통학교로 맨 위 사진 속 학교 건물 뒤로 건물이 확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A 건물은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 B 건물은 동대문교회이다.
이렇게 공간의 확장까지 이루어낸 동대문 여자 주간학교는 1925년 11월 ‘동대문여자보통학교’라는 교명으로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1923년부터 각종학교 중 기본재산, 학교 설비, 자격있는 교사진을 갖추고 있으면 학무국에서 실사를 하고 지정학교로 인정해주는 제도를 시작하였다. 이에 W.F.M.S.에서는 동대문 여자 주간학교에 대해 보통학교 인가 신청을 한 것이다. 총독부의 인가를 받게 됨에 따라 이 학교의 졸업생은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1936년 경성 내 운영되고 있는 보통학교들을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실었는데 5월 10일자에 ‘동대문여자보통학교’가 나온다. 기사에 따르면 학교는 1906년 개교 이후 오랫동안 잡종(각종)학교로 지내오다 1925년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누적 졸업생은 500여명으로 올해(1936) 22회 졸업식을 거행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동대문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여학생 408명이 교사 7명과 함께 470평의 주택식 교사에서 ‘학교는 내 집’이라는 교훈 아래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전하였다.
이처럼 동대문 지역 여학생들의 초등교육기관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던 동대문여자보통학교는 1938년 조선총독부의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경성동대문여자심상소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1939년 일본과 미국 간의 전쟁 발발 분위기가 고조되며 이는 조선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거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감리교 선교재단은 1940년 11월 선교사 철수를 결정하고 12월부터 빠르게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W.F.M.S.에서 운영하고 있던 경성동대문여자심상소학교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귀국과 감리교 선교부가 철수함에 따라 1941년 이 학교는 결국 폐교의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다만 학교는 폐교되었으나 학교가 사용하던 건물은 이듬해 새로운 학교의 개교와 함께 다시 학생들을 맞이하였다.
새로 개교한 학교는 동구가정실수여학교(東丘家政實修女學校)로 설립자는 김활란과 정영길, 교장은 동대문여자보통학교 당시 실질적인 교장 역할을 하던 교장 대리 조석봉이었다. 이 학교는 감리교 재단으로부터 학교 건물 및 부지를 무상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승낙을 받아 이곳에 학교를 열었다. 1944년 1월 동구여자상업전수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으며 1945년 8월 해방 직후인 10월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칭한 후 동대문 언덕 초입에서 학교를 이어갔다.
한편, 학교와 같은 동대문 언덕 구역 내 위치하고 있던 이대동대문병원은 한국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8년 신관을 낙성하며 진료 공간의 지속적인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에 병원은 동구여상의 건물과 부지를 다시 인수받아 병원 진료공간으로 사용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학교는 1961년 3월 서울 성북동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동구여상이 사용하던 건물은 외래진찰소로 이용하였으며 1973년 중앙진료부가 완공되어 외래진찰소가 중앙진료부로 이동 배치된 후 같은 해 12월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1915년 처음 지어진 후 45년간은 교육의 공간으로, 마지막 12년은 진료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972년경 이대동대문병원 모습. 중앙에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은 중앙진료부이며,
빨간 원 안에 건물이 당시 외래진찰소로 사용하고 있던 구(舊) 동대문여자보통학교 건물이다.
이처럼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시간 동안 동대문 언덕에서는 여성을 위한 진료 뿐만이 아닌 미래의 희망으로 자라나는 여학생들을 위한 초등교육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속되었다. 비록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비율이 크지 않았다 하여도 보통학교에서 글을 배우며 습득한 인문학적, 과학적 지식은 이들이 성장해 나아가며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 사회적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김마르다가 뿌린 작은 씨앗이 일제강점기 동대문 지역 여학생 교육과 선교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였고 그 공간을 이대동대문병원이 동대문에서 철수하는 그 때까지 귀하게 사용했음을 이화의료공동체가 오래 기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