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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한국여성의학교육의 못자리 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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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12-03 조회수 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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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창설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화에 공식적으로 의과대학이 설립된 것은 1945년 8월 해방 후 10월 학제개편을 통해서이지만 이화에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의학 교육이 진행되었던 것은 훨씬 더 그 역사가 깊고, 그것은 한국 여성 의학교육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1890년 로제타 셔우드가 보구녀관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하며 김점동, 여메례, 노수잔 등 이화학당을 다니던 영민한 아이들을 my girls라 부르며 기초 의학 과목인 생리학, 약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의료보조훈련반’(Medical Assistant Training Class)이라 칭해지는 이 수업은 한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근대 의학 교육의 첫 발걸음이었다. 비록 이들을 ‘당장 의사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시작한 교육은 아니었으나 로제타의 수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생리학과 약리학으로 시작하여 약물학과 치료학 등으로 교수 과목이 늘어났고, 보구녀관에서 약을 제조하고 환자들을 돌보는 방법에 관한 실질적인 수업도 진행하였다. 그러나 1892년 로제타 셔우드가 윌리엄 제임스 홀과 혼인을 하고 1894년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떠나게 되며 의료보조훈련반 수업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로제타의 뒤를 이어 보구녀관을 맡은 메리 커틀러 역시 조선인들이 조선인을 스스로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가지며 여성의료인력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커틀러는 마가렛 에드먼즈 간호사와 함께 1903년 보구녀관에 간호원양성학교를 열어 한국인 간호사 배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다. 1906년부터는 W.F.M.S. 연례보고서에 여의사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보고하였으며, 1908년에는 보구녀관에서 학생을 모집해 의학생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2년 커틀러가 평양으로 임지를 옮긴 후에는 이미 그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로제타 셔우드 홀과 함께 의학강습반(Medical Class)를 만들어 의사가 되고자 하는 뜻을 가진 여학생들에게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커리큘럼, 교사, 시설 등이 구비되어 있지 못하였거니와 조선총독부에서 1913년 조선 총독이 지정한 의학교를 졸업하거나 미지정 사립의학교 졸업자의 경우 별도의 의사시험에 합격해야만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규칙을 발표함에 따라 홀과 커틀러는 의학강습반 여학생들의 국내외 전문의학교 입학을 주선해주었다. 그렇지만 평양 의학강습반 교육을 중지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1910년대 후반까지 의학강습반의 교육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곳에서는 전문의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여학생들을 위한 기초(예비) 의학교육이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커틀러와 홀의 노력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기에 이것이 바탕이 되어 1928년 로제타 홀이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또 동대문부인병원은 이같은 과정속에서 배출된 1920~30년대 한국인 여의사들의 대표적인 수련 공간이자 진료 활동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나 193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되었던 것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며 발전적 해체를 하였고, 동대문부인병원은 1943년 개인에게 매각되며 이화에서의 여성 의료와 의학교육 역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해졌다.

게다가 1940년대 들어서며 조선총독부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로 이화여전의 교육은 일제의 입맛에 따라 변칙 운용되기 시작했다. 1943년 12월 전시 <교육임시조치령>으로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고 모든 정규 대학 업무는 중단되었다. 1945년 3월에는 교명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4월 신학기 극히 제한적 형태의 정규대학 업무가 시작되었는데 기존의 문과, 음악과, 가사과, 보육과 대신 3년제의 후생과와 육아과, 1년제의 보육전수과와 교육전수과가 개설되었다.

후생과(厚生科) 과장은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안과의사 최재유(崔在裕)였다. 1945년 6월~8월 경성여전 후생과 교원은 최재유(산과학)를 비롯하여 의사 윤형로(내과학), 이병희(생리해부학), 이기섭(외과학), 윤일선(병리세균학)이었다. 현재 경성여자전문학교 후생과의 정확한 교육 과정은 확인할 수 없으나 위의 교원들이 임상의학의 기본 과목인 내외산과와 기초의학의 기본 과목인 생리해부와 병리세균학을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후생과의 교육 과정에는 의학교육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화100년사》에서는 이 후생과가 해방 후 의학과 설치의 산실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1943년 개인에게 매도했던 동대문부인병원을 1945년 3월 다시 인수하였다. 이로써 동대문부인병원 역시 해방 후 설치된 의학과의 실습병원으로 자리매김하며 보구녀관에서부터 이어져 온 이화 의료의 역사를 다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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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경성여자전문학교 부속병원이 사용한 이화여대 파이퍼홀(1953년 전경)>



한편 이화는 후생과 신설과 함께 신촌 캠퍼스 내에 또 다른 병원-경성여자전문학교 부속병원-을 시작하였다. 병원은 교내 파이퍼홀(현 이화여자대학교 본관)을 사용하였는데 1945년 6월 1일부터 진료를 시작하였다. 아래는 《매일신보》 1945년 6월 1일자 기사이다.


상략) 동교에서는 생리(生理)와 간호(看護)에 대한 여학교 교원과 또는 각 지방에서 실시하고 있는 보건부(保健婦) 양성소 지도원이 될 자격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번에 새로 부속병원을 개설하기로 되여 31일 오후 한 시에 동교 60주년 기념식과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6월 1일부터 개업할 터인데 이 부속병원의 초대 원장에는 오바(大庭肇) 박사가 취임하였으며 사무장에는 키노꼬(木子東華)씨이다. 그리고 부내 동대문부인병원을 인수하여 동교 부속병원 동대문분원으로 정하고 분원장에는 가가와(賀川淸邦)씨가 취임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산과(産科)와 조산법(助産法)의 실지에 산 체험을 쌓도록 하기로 되였다.



1945년 5월 31일 이화 개교 60주년 기념식과 함께 경성여자전문학교 부속병원 개원식이 진행되었다. 신설 부속병원 원장인 오바(大庭肇) 박사는 후생과 교원 중 한 명이었던 윤형로(尹衡老, 내과) 의사였으며, 동대문분원장 가가와(賀川淸邦)는 이상옥(李象玉, 산부인과) 의사이다. 사무장 키노꼬(木子東華)는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바 있던 이동화(李東華)씨였다. 위 기사 내용을 통해 후생과는 생리・간호 교육을 하는 교원, 보건부양성소 지도원 등의 배출에 목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차대전 막바지 전쟁에 모든 총력을 기울이며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가 담겨있던 것이다.

당시 《경성일보》에는 부속병원 진료 광고가 여러 차례 실렸는데 신촌 소재 부속병원에서는 내과, 외과, 피부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방사선과를 동대문 분원에서는 산부인과를 진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두 개의 병원이 후생과 학생들의 실습병원 역할과 함께 일반 환자의 진료에도 중점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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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 1945년 6월 18일자 광고



신촌 파이퍼홀에 개원하였던 부속병원이 언제까지 진료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개원 2개월 후 해방을 맞음과 동시에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으며 9월에 신입생 모집 광고와 함께 입학 시험을 진행하고 10월 22일 900여 명의 학생들로 개강식을 치룬 것을 보면 해방 이후의 시간부터는 신촌 캠퍼스 내에서 정상적인 병원 진료가 이루어지기 어려웠으리라 추측된다.

오히려 본교와 거리상 떨어져있던 동대문병원이 낡기는 했겠으나 병원 시설이 오랜 기간 갖추어져 있는 상황이었고, ‘진료’라는 병원 본연의 역할에도 집중하기에는 훨씬 더 나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이에 1945년 12월 동대문병원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이자 의학과의 실습병원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46년 1월 31일 《동아일보》에서도 ‘조국의 해방과 동시에 대학으로 승격한 이화여자대학에서 의학과, 약학과생 실습과 일반 의료의 편의를 주기 위해 동부속병원을 동대문분원으로 이전, 확충하고 각 과를 개설했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화의대의 시작은 1945년 해방 이후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보구녀관과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오며 여러 의료 선교사들의 한국인 여의사 양성의 위한 의지와 노력, 그리고 실질적인 준비 교육 등이 켜켜이 오랜 기간 축적되어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정식 여의사를 배출하는 제도를 완성하지는 못하였지만 보구녀관에서 시작된 여성 의료인 배출을 위한 이화의 노력은 분명 의미있는 발걸음들이었다.

해방 이전까지 이화에서 이어진 한국여성의료교육의 역사는 때로는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고, 때로는 어두운 시대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만 했던 고난의 시간이 모두 녹아져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과 아픔들의 결실이 모여 해방 후 첫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이화에 여자의과대학 설립이 이루어졌고 이후 이화에서 배출한 여의사들은 한국 여성의학계를 이끌어나가는 주역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