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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로제타 홀이 딸을 기념하며 만든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

파일 썸네일_특별기고.png       
작성일 2025-12-03 조회수 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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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구녀관에 들어와 오른쪽 옛 약방 공간에 들어오면 아래 사진을 만날 수 있다. 쌍둥이를 안고 있는 한국인 여성을 진료하고 있는 의사는 로제타 셔우드 홀이다. 사진 하단에는 ‘새 병원에서 태어난 첫번째 쌍둥이(First twin babies born in the new Hospital)’, 사진 상단에는 ‘평양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에서(In The Edith Margaret Chidren's Ward, Pyeng Yang)’라고 쓰여있다. 따라서 이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사진은 평양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에서 로제타 홀 의사가 쌍둥이를 낳은 산모를 진료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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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병동의 이름인 ‘이디스 마가렛’은 누구인가? 그 답 또한 이 사진 안에 들어있다. 바로 이 진료실 벽면에 붙어있는 액자 안 어린 여자아이가 바로 ‘이디스 마가렛’으로 1898년 사망한 로제타 홀의 딸이다.

1890년 서울 보구녀관에서 의료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로제타 셔우드는 1892년 서울에서 같은 감리교 의료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혼인하였다. 1893년 남편이 먼저 평양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고, 로제타는 이듬해 5월부터 남편과 같이 평양에서 여성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11월 24일 남편 윌리엄이 발진티푸스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로제타는 남편의 장례를 치룬 후 어린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5년 1월 6일 미국에 도착한 로제타는 12일 후인 1월 18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집에서 딸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위 사진의 액자 속 여아인 이디스 마가렛 홀이다.

로제타는 1897년 11월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한국 땅에 돌아와 남편의 뜻이 미처 만개하지 못한 평양에서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6개월 여 간 서울에서 준비를 마친 후 1898년 5월 2일 로제타와 두 자녀가 평양에 도착했다. 그런데 평양 도착과 함께 이디스 마가렛은 이질에 걸렸고 로제타의 간절한 돌봄에도 불구하고 결국 5월 23일 저녁 8시 40분 사망하였다. 25일 평양에서 장례식을 치룬 후 이디스의 관은 서울로 옮겨져 6월 1일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이 묻힌 양화진에 묻혔다.

로제타 홀은 딸을 잃은 아픔을 삭힐 새도 없이 예정된 평양 여성병원 개원에 박차를 가하여 1898년 6월 18일 광혜여원(廣惠女院, Woman's Dispensary of Extended Grace)의 첫 진료가 시작되었다.

로제타는 이디스가 남긴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 이디스의 용돈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 돈과 자신이 이디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주려고 모았던 돈을 합쳤다. 그리고 이것을 종잣돈으로 삼아 어린이 병동을 짓기로 마음 먹고는 자신의 뜻을 담은 편지를 써 고향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편지를 읽은 미국 친구들이 그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150달러를 모아 어린이 병동 신축 기금으로 쓰라고 보내주었다. 이후에도 미국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 금전, 물품 기부가 이어졌고 장로교 여의사 피시도 25엔을 로제타에게 기부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 봄까지 약 400달러의 기금이 모였고 이를 기반으로 광혜여원 옆에 목재로 어린이 병동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어린이 병동이 바로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이다.

아래 사진은 이디스 병동 신축 당시의 모습이다. 한국인 목수와 인부들이 공사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사진 왼쪽에 긴 기둥을 어깨에 지고 있는 이가 이 공사의 책임 목수였다. 오른쪽 뒤 기와 지붕 집은 당시 로제타 홀이 거주지 겸 진료소로 사용하고 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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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후원금을 바탕으로 건축된 이디스 병동은 1900년 완공되어 어린이 병동으로 사용되었는데 《로제타 홀 일기》에 병동의 방 하나에 대한 소개가 있다. 이 일기를 쓴 날(1월 18일)은 이디스 마가렛의 생일날로 로제타는 딸의 생일을 맞아 이디스 또래의 여자 아이들 7명을 초대해 이 병동에서 파티를 열었다.

“벽에는 멋진 금색 액자에 담긴 이디스의 초상 그림이 걸려 있고, 선반 위에는 이디스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있었다. 낮은 탁자에는 흰 식탁보가 씌워져 있고 그 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예쁜 다과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기념품으로 가져가도록 작은 색유리 그릇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일본제 색깔 사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로제타 홀 일기》 6권 1900년 1월 18일 내용 중)

로제타가 일기에서 언급한 금색 액자 속 이디스의 초상 그림은 아마도 첫번째 사진 벽에 걸려있는 이디스의 사진 액자일 것이다.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은 어린이 진료와 함께 시각장애인을 위한 공간으로도 쓰였다. 로제타 홀은 이 곳에서 시각 장애 소녀 오봉래에게 미국에서 배워온 뉴욕 포인트 점자를 활용해 맹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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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마가렛 어린이병동. 아직 완공되기 전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혜여원과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은 1906년 11월 3일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로제타 홀은 기홀병원 옆 부지에 광혜여원 신축하기로 하고 1908년 5월 20일 기공식을 가졌다. 새 병원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졌으며 1909년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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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한 광혜여원과 광혜여원 의료진들. 뒤쪽의 건물은 기홀 병원이다.



그런데 광혜여원 신축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 신축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환자들 진료 공간에 이디스 사진이나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이라는 푯말이 붙어있는 것들이 있다.

또 첫번째 사진 속 이디스 액자 왼쪽 작은 액자 속 사진은 아래 사진인데 앞줄 왼쪽에 로제타 홀이 있고 뒷줄 왼쪽 두번째는 광혜여원에서 근무하던 홀맨(Sarah B. Hallman) 간호사이다. 홀맨 간호사는 1907년 조선에 파견되어 평양에서 활동하였으므로 그녀가 근무한 공간은 새로 지어진 광혜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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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첫번째 사진 속 공간은 1900년 완공되었던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 건물 내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 역시 이디스의 액자와 액자 아래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이라고 쓰여있는 액자가 있는 방에 환자들이 누워있는데 오른쪽에 아기를 안고 있는 간호사가 홀맨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은 1906년 화재로 전소된 이후 새로 신축된 광혜여원 내부의 한 공간을 정하여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으로 명명하고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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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조차 없듯 그 아픔을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남편도 없이 낳은 딸을 역시나 남편이 떠난 조선 땅에서 또 다시 떠나보내야 했던 로제타 홀의 심정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극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딸이 남긴 용돈을 종잣돈으로 그녀를 기념하는 어린이 병동을 만들고 딸의 사진이 걸려있는 방에서 아픈 아이들을 진료하며 이디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건네는 과정에서 로제타 자신의 마음 또한 치유하고자 노력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그렇기에 이디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 건물이 단독으로 있었으냐, 광혜여원 안에 공존하고 있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이들을 제대로 진료하기 위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한 로제타 홀의 뜻이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고 이어지는 것이 중요했다. 가정의 달을 보내며 소외되고 존중받지 못한 이들에게 손길을 내밀었던 로제타 홀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