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마지막 선교 의사 버니타 블록
인력을 갖추는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세기 말에 비해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증가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에서의 선교지역과 활동영역이 넓어지다보니 여전히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에 파견된 의사는 메리 스튜어트뿐이었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의 의학교육 실태를 분석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한 플렉스너 보고서(Flexner Report)를 발표했다. 플렉스너는 이 보고서에서 당시 북미지역의 많은 여자의과대학의 재정, 시설, 교수진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했고 실제 이 보고서의 발표 후 많은 여자의과대학들이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인가를 유지하지 못해 폐쇄되었다.
해외로 파견하는 여성 의료선교사의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18년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나 동경 유학을 통한 한국인 여의사들의 배출이 시작되며 진료 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 또한 1917년부터 다시 경성에서 여자의학생 양성 업무를 맡았으며 스튜어트 의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가는 기간에는 한국인 여의사들과 함께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업무를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홀은 1926년부터 국내 여성의학교육기관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온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물론 안수경, 현덕신, 길정희 등의 한국인 여의사들이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에서 환자들을 성심껏 돌보며 병원이 날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이 병원은 원칙적으로 W.F.M.S.가 운영하는 선교병원이었기 때문에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 선교 의사가 필요했다.
한국 파견을 명받았다. 1927년 한국에 도착하여 우선 한국어 공부에 전념한 후 1928년경부터 본격적인 병원 업무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아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세 쌍둥이 출산은 병원 개원 이래 두 번째 케이스였다. 분만 업무 외에도 이화전문학교, 이화고등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공립학교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학생들 대상의 공중보건 관련 강의를 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리매김하며 병원의 명성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또 건강한 자녀 양육 책임이 ‘엄마’에게 쏠렸던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영유아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공중보건사업, 아동복지사업에 주목하는 쪽으로 병원 운영 방향을 수립하고 이끌어 나갔고 그 중심에 버니타 블록이 있었다.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은 안수경 의사와 엘리자베스 로버츠 간호사의 지휘 아래 계속 운영이 이어졌다. 그리고 1936년부터는 더 이상 선교본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는 자비량(self-supporting) 방식으로 운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선교 의사 파견은 종료되었다.
미시간주 보건부(Department of Health)의 아동위생 및 공중보건 간호국(Bureau of Child Hygiene and Public Health Nursing) 활동 의사로 임명되었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40~45년 알래스카에서 모자보건 활동을 펼쳤으며 알래스카지역 장애아동협회(Alaska Crippled Children's Association) 조직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47년 조지 리드비터(George Vernon Leadbetter)와 혼인하였으며, 1975년 7월 15일 플로리다주 세인트클라우드에서 만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굳건히 유지될 수 있도록 힘쓴 블록 의사의 노력이 있었기에 선교사들이 떠난 이후에도 병원이 흔들림없이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