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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초창기 이화여대 의학과의 기틀을 마련한 선교의사 머레이

파일 역사.jpeg       
작성일 2025-12-03 조회수 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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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이화는 8개의 학과를 개설해 신입생을 모집하며 종합대학으로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기 시작했다. 새롭게 출발한 이화에는 행림원 소속 의학과가 개설되어 90여명의 신입생이 입학하였다. 이것이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공식적인 출발이다. 그리고 첫 신입생이 예과 교육을 마치고 본과로 올라가는 1947년 9월 의학과는 의학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의학부에 예과와 본과를 설치했다. 본과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이제 보다 전문적인 의학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해야 함을 의미하며, 이를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런 준비가 이루어진 것일까?

김활란 총장은 일찍이 남학생들의 존재 때문에 여학생들이 교육의 기회에 있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우려하며 여자대학의 존립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해방 후 이화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며 개설된 학과들의 교육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수진 확충에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의학과는 일제강점기 여러 의과대학에서 활동하던 많은 일본인 교수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화는 의학과를 새로 개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의 기반을 마련할 인물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적합한 인물을 수소문하던 김활란이 이 막중한 임무의 적임자로 선택한 이는 함흥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력이 있던 캐나다 출신 여의사 머레이였다.

플로렌스 머레이(Florence Jessie Murray)는 1894년 2월 1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픽토우랜딩에서 태어났다. 십대 초반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에 선교사 한 명이 찾아왔는데 그는 조선에 파견되어 활동하다 안식년으로 귀국했던 이였다. 그로부터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캐나다 장로교 소속의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과 맥밀란(Kate McMillan) 의료선교사의 활약을 듣고는 깊은 감명을 받아 의료선교사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1914년 달하우지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머레이는 1919년 졸업을 한 후 미국 보스턴의 롱아일랜드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하였다. 이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모교의 해부학 실습강사로 외과의사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의료선교사로 지원하였다.

1921년 여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해 8월 31일 27세의 나이로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은 머레이는 2개월 간 서울에서 어학공부부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동대문부인병원을 방문해 병원 시설을 견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1년 12월 용정 제창병원에 부임해 2년여간 활동한 후 1923년 맥밀란 의사의 뒤를 이어 함흥 제혜병원으로 이동하여 1942년 6월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될 때까지 약 20여년간 함흥지역 의료를 위해 헌신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간 머레이 의사는 자신의 병원을 열어 내과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45년 8월 한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재입국의 기회를 엿보던 찰나, 1946년 드디어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도가 마련되었다. 바로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 총장이 이화에서 함께 일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머레이 의사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활동할 당시 이화나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근무한 일은 없었으나 캐나다 연합교회 여선교회가 1920년대부터 이화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머레이 의사가 소속된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역시 이 연합교회 안에 속해있었기에 김활란 총장은 머레이 의사의 그간 활동과 역량을 확인한 후 의학과 운영의 조력자로 그를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김활란 총장의 요청을 받은 머레이는 한국행을 결정한 후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소규모 의과대학 9곳을 방문해 의과대학 설립과 운영에 대한 정보와 조언을 얻었다. 그리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희망호를 타고 한국으로 향해 1947년 7월 5년만에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도착 후 김활란을 만난 머레이는 당시 이화 의학과가 독립 건물, 교과서, 장비, 예산 등 교육에 필요한 제반 여건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학생들과 기존 교수들이 수업을 위한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고 당장에 필요한 건물과 장비는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협조를 하기로 했다, 또 현재 한국에는 여성 의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여성이 의료 훈련을 받을만한 적절한 교육기관이 부재하므로 이화가 그 일을 해야한다고 말하는 김활란의 믿음과 결단력에 설득되어 행림원의 부학장직을 맡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후 머레이 의사는 동대문병원에 가서 병원의 상황을 파악한 후 의과대학 운영에 필요한 물건 목록을 뉴욕 감리교회 여선교회에 보냈다. 이 때 요청한 장비의 일부가 1년 후인 1948년 7월 도착했다. 1947년 9월 본과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어로 된 교과서가 없었기에 교수들은 한국어 교재를 만들어야 했고, 실험과목 역시 교수들이 실험장비를 직접 만들거나 실험없이 강의로만 수업을 해야했다.

다음은 1948년 제출된 본과 4년의 교육과정으로 교과 편성에 있어 행림원 부학장이었던 머레이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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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 교육에 있어 필수였던 실습과 관련해서는 동대문병원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되어 있기는 했으나 모든 실습을 진행하기에는 여건이 충분치 못하였다. 이에 본과학생들은 세브란스부속병원에서 해부학 실습, 서울의대 조직학 실습실에서 조직학 실습, 임상실습은 용산 철도병원을 이용하였다. 설상가상 1949년 1월에는 동대문부속병원에 화재가 발생해 병원이 전소되며 진료와 학생 실습에 사용하려고 했던 많은 물품, 장비들이 소실되었다.

화재 후 병원 시설을 복구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던 머레이에게 세브란스병원에서 이직을 요청하였다. 그녀가 속해있던 캐나다 연합교회 대표부에서도 머레이 의사가 담당하던 이화에서의 업무를 대신할 이를 찾게 하였다. 결국 머레이는 1949년 이화를 사임하고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화에서의 교육활동을 완전히 중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이화에 와서 의대생들을 가르치고 직원회의에 참석하며 병원 감독 일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머레이 의사는 1947년 한국에 돌아온 후 기독교인 여의사들과 함께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대한기독여자의사회’의 창설로 이어졌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대한기독여자의사회의 시작이 1947년이었는지, 1948년이었는지 확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머레이 의사의 주도로 이 단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이 모임에 함께했던 대표적인 한국인 여의사로는 일제강점기 평양 광혜여원, 평양 연합기독병원에서 근무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애희, 동대문부인병원 부설 경성탁아소 주치의로 근무한 바 있던 한소제가 있다. 김애희, 한소제 모두 의과대학 공부를 하던 시기 로제타 홀 의사와 깊은 인연이 있었고, 의사가 된 후에는 1926년 의학공부를 더 하기 위해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열정 가득한 의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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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머레이 의사 / (우)대한기독여자의사회 초창기 회원들. 아랫줄 맨 왼쪽부터 김애희, 머레이, 한소제 의사



세브란스 병원과 의대에서 활동하던 머레이 의사는 1956년 강원도 원주로 파송되어 원주기독병원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1957년부터는 원주에 경천원이라는 한센병 전문병원을 개설하여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 및 완치 후 사회복귀에도 힘썼다. 1961년 은퇴한 후에도 한국에서 활동하던 머레이는 1969년 5월 캐나다로 영구 귀국해 1975년 4월 14일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에서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4・19혁명 등 치열했던 한국 현대사를 한국 땅에서 몸소 부딪히며 살아낸 의료선교사 머레이. 그의 긴 의료선교 역사 중 이화에서의 시간은 짧았지만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이화 의학과 교육의 기반을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그 경험 속에서 한국 여의사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이들의 성장시킬 수 있는 조직(대한기독여자의사회)을 창설해 여의사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이화 의과대학의 발전과 여의사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열매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