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최초의 여성 생리학자이자 한국 여성 최초 의과대학장 김구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학업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아 의사로서의 첫 발을 조심스레 내딛을 수 있었다.
에서 이후 자신의 평생을 바쳐 기초의학분야 연구에 몰두하며 후학을 양성해 의학교육 발전과 한국 여의사 권익 신장에 공헌을 한 김구자 선생이 있다.
일제하에서 고등여학교까지의 공부를 마친 직후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그는 바로 해방과 함께 대학교육과정을 재건하고 신입생을 뽑는 이화여자대학교 의학과 1회 입학생으로 들어왔다. 2년의 예과 과정을 마친 후 1947년 본과에 진입하였는데 당시 동대문부속병원의 실습 여건이 충분하지 않아 용산철도병원에서 실습을 하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이곳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화여대 의학과 1회 입학생들 중 6년의 학업을 모두 이수한 학생 27명(3명은 전시연합대학 졸업)이 1951년 8월 행림원 의학과 1회 졸업생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김구자 선생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현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임상병리과로 자리를 옮겨 1년여 간 근무를 했으며 한국전쟁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1953년 4월 서울로 올라와 적십자병원 임상병리과에서 다음 해 10월까지 임상 활동을 이어갔다. 이렇게 의과대학 졸업 후 3년간 의료 현장에서 활동을 한 김구자 선생은 1954년 11월 이화여대로 돌아와 의과대학 조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고, 이후 평생을 이화에서 학자이자 교육자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했다.
<한국인 여자대학생의 기초신진대사>라는 논문으로 1960년 2월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다시 1963년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해 석사과정에서 연구한 내용을 확장, 발전시켜 <한국인 남녀학생의 기초신진대사 활동대사 및 일일 소비열량에 관한 연구>라는 박사논문을 완성해 1966년 2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4호 박사학위였다.

<김구자 선생의 박사학위 취득 기사가 실린 『이대학보』(1966.2.28) 원 안의 사진 속 인물이 김구자 선생님>
플로리다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에서 2년여 간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귀국 후 다양한 연구 논문 발표와 함께 다년간의 강의 경험을 토대로 생리학을 학습하는 의과대학 및 기타 전공의 학생들을 위해 《생리학》(1981년 초판, 1987년 개정판)을 집필하였다. 초판을 발간하고 6년 후에는 사용 과정에서 발견한 미비점들을 보완하고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반영해 개정판을 펴냈다. 이 외에도 번역서로 《인체기능학》(John M. Cooper, Ruth B. Glassow저 / 김구자, 김신실 共譯, 1977)과 《생리학》(Color Atlas of Physiology, Stefan Silbernagl, Agamemnon Despopoulos저 / 김구자, 황애란 共譯, 1986)을 출판하였다. 이처럼 30년 이상 생리학자로서 진행한 연구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1987년 10월 대한생리학회 제31대 회장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1989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31차 국제생리학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며 한국인 첫 여성 생리학자로 그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에는 교양생리와 체육대학, 간호대학, 사범대학의 특수교육학과, 약학대학의 생리학 수업을 담당하였다. 1960년대 미국 연수를 다녀온 후 그는 의과대학의 주요 보직을 맡기 시작하며 1970~80년대 이화여대 의과대학이 국제기준에 맞춘 교육과정과 임상수련시간 등을 정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미 20여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의료계에서 여성 의과대학 교수가 의과대학장직을 맡는다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에서 진행된 아시아 태평양지역 의학교육연수원에 다녀와 교과과정연구를 활발히 진행했다. 또 1978년에는 한국의학교육협회(1971년 창설)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의사국가고시 개선협의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특히 1971년 10월 22일 설립된 환경문제연구소는 인구의 증가와 공업의 발전 및 도시화로 인한 공해문제를 연구하고 공해에 대비하여 자연을 보호·보존함으로써 인간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연구와 사업을 진행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이화의 초창기 교내 연구기관이었다. 초대 연구소장은 생리학교실의 김동준 교수였으며, 김 교수의 퇴임 후 김구자 선생이 2대 소장을 맡아 공해원으로 중금속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리학적 측면에서 연구하고, 인간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조성을 위한 연구와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미국에 연수를 나가있는 상황이라 회장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의 의과대학 동기이자 이화의대 약리학교실 교수였던 김혜성 선생이 한국여자의사회 7대 회장을 맡았다.
1988년 10월 6일 서울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지원하기 위해 방문한 김구자 회장 및 한국여자의사회 임원진.
중앙에 검정색 자켓을 입은 이가 김구자 선생님
대학 및 동창회 행사에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그리고 2011년 8월 20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처음 의학도의 길에 발을 들인 이후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및 여의사 권익 증진에 헌신했다. 이같이 한 길만을 보고 달렸던 그의 삶이 있었기에 이화의대는 현대 한국의 여성 의학 인재를 키워내는 산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김구자 선생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김구자 선생님 정년퇴임식(1994.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