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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오직 여성만이 여성을 살릴 수 있다” 북감리회 여선교단의 거룩한 행보

파일 박에스더.jpg       
작성일 2023-07-12 조회수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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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은둔의 나라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해 주세요.

오늘 저는 얼마 안 되는 돈이나마 선교회에 맡기겠습니다.

때가 되면 조선 여성을 위해 써 주세요.

루신다 볼드윈(Lucinda B. Baldwin)

1883년 9월 미국 오하이오주의 라베나 시. 미국 북감리회 여선교단(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W.F.M.S.) 지부 회의에서 인도와 일본 여성을 위한 지원이 한창 논의되던 와중에, 루신다 볼드윈 여사(Lucinda B. Baldwin)가 일어나 한 말이다.

당시는 전 세계 수많은 여성의 삶을 구원한 W.F.M.S.의 첫 여성 선교사가 인도 땅을 밟은지 13년이 지난 때다. 동양의 작고 조용한 나라 ‘조선’에도 W.F.M.S.의 은총이 닿게 된 계기는 당시 고령의 미국 여성이 품은 선한 마음에서 발현됐다.

당시 볼드윈 여사가 어떻게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알고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알기 어렵다. 우리는 그저 한 해 전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고, 그해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이라는 책을 펴내 구한말 조선의 존재가 알려졌으리라는 추정만 가능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볼드윈 여사가 내놓은 88달러 기부금이 어둠 속에 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한 줄기 빛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그 빛은 스크랜턴 여사가 한국 땅을 밟아 이화학당과 보구녀관을 세우게 했다. 그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적이 가능해졌다.

점동이를 박에스더로 키운 W.F.M.S.

정동 아펜젤러 목사댁 집사였던 김홍택 씨의 셋째 딸 점동은 W.F.M.S.가 있었기에 국내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가 될 수 있었다. 점동은 10살 나이에 이화학당에 맡겨져 선진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또 로제타 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 중에도 W.F.M.S.의 후원금을 받았다. ‘로제타’라고 이름지었던 작은 아기의 사망, 그리고 남편의 사망까지…. 인고의 시간을 거친 점동은 한국인 최초로 여의사 ‘박에스더’가 되어 W.F.M.S. 파송 의료 선교사로서 조선에 돌아온다. 그리고 매년 수천 명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되갚는다. ‘W.F.M.S.가 심은 기적의 증거’인 박에스더는 1902년 이렇게 감사를 표했다.

외방전도회(W.F.M.S.) 한 지가 30년이지만 한 일을 되돌아보면 참 신기하도다.

이처럼 크게 각국에 400여 부인을 보내시고 학교와 신문사를 설립하여

여인의 지식을 넓게 하시니 참 감사하도다.

(중략)

믿음이 겨자씨만큼 있는 자가 능히 산이라도 옮기리라 하신 말씀이 참 같다..

신학월보, 19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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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F.M.S.의 후원으로 미국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한 박에스더

이처럼, 전 세계 수많은 여성의 삶을 구원한 W.F.M.S의 시작은 1869년 미국 보스턴의 한 작은 교회에서 시작됐다. 1869년 3월 23일 비바람을 뚫고 미국 보스턴의 트레몬드 스트릿 교회(Tremont Street Church)에 모인 여인들은 목사인 남편과 10년 간 인도에 머물렀던 파커 부인으로부터 인도 여성의 비참한 삶을 듣고 한 가지 결론이 이르렀다.

오직 여성만이 그곳의 여성에게 접촉할 수 있다.

크리스찬 여성이 인도에 가지 않는 한, 인도를 선교할 수 없다.

그렇게 교회 여신도 여덟 명은 힘을 모아, 독신 여성을 인도 현지에 선교사로 파견하는 데 뜻을 모았다. W.F.M.S.의 시작이었다.

옷값을 아껴서라도 선교사를 보내야한다

타국 여인들의 삶을 구해야한다고 뜻을 모으긴 했지만, 그들 스스로도 이름 없이 '누군가의 부인'으로 불릴 뿐이었다. 미국 최초의 여의사(엘리자베스 블랙웰)가 탄생한 것이 1849년이니, 불과 20여 년이 흘렀을 뿐이다. 자신의 이름도 못 쓰는 여성도 많았고, 교육 받은 여성도 결혼하면 집안에서 육아와 가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럼에도 미국 사회는 변하고 있었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벌어지자 남성들은 전쟁터로 몰려갔고, 남성들이 맡던 일을 여성들이 도맡았다. 여성의 교회 활동이 활발해졌고 신앙심과 사명감이 커졌다. 4년 뒤 전쟁이 끝나고 남성들이 복귀하며 여성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여성들은 본인보다 더 어려운 여성들을 향해, 해외 선교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옷값을 아껴서라도’ 해외로 여성 의료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고 결의한다. ‘진심으로 기도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임의 주춧돌이 되시기에, 모임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믿으며.

1903년 기록에 따르면 W.F.M.S.는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아프리카 불가리아 필리핀 등지에 265개의 선교단을 파견했다. 또 여학생을 위한 중등 및 고등 교육기관, 신학교 등을 설립하고 병원과 시약소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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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W.F.M.S. 이들 역시 각자의 이름 대신 ‘누군가의 부인’으로 불렸다.

이름 없는 여성들의 푼돈에서 시작된 W.F.M.S.는 미국의 여러 선교회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얻었다. 여성들의 간절함이 이룬 성과다. 보구녀관 3대 병원장 로제타 홀의 일기에는 W.F.M.S.에 대한 강한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는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곧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약품을 주문했다.

그러나 기구를 더 살 돈이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할 때 도와주는 은행과 같은 리버티의 내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참고문헌>

-이향애 등, 한국 여자 의사 120년과 Professionalism,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2020

-권복규, 보구녀관 1887~1913 최종보고서, 2018

-The Story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69-1895 등

이화의료원 135주년 역사 기념 편찬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