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숭고한 희생의 이름, 릴리안 해리스
1913년 6월 9일, 서울 동대문 언덕 위 3층의 멋진 붉은 벽돌집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변이 전부 낮은 한옥을 내려다보는 서양집은 금방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로제타 홀, 언더우드, 애비슨 등 조선에 머물던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들뜬 마음으로 봉헌식에 참가했다. 미 북감리회 선교단은 이 병원을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이라고 명명했다. 조선인들은 병원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 ‘동대문에 있는 부인 병원’이라고 불렀다. 이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선교사들이 그럼에도 ‘릴리안 해리스’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이 땅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로 헌신한 릴리안 해리스를 기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의사 릴리안 해리스는 1863년 미국 오하이오주 델러웨어에서 태어났다. 19살 터울의 언니 메리안 해리스는 1874년 미 감리회 일본 선교사로 부임해 선교활동을 했다. 릴리안 해리스도 신시내티 의과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897년 11월 10일, 의료 선교사로서 로제타 홀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그녀가 낯선 조선땅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곳은 동대문에 있던 볼드윈 진료소였다. 당시 보구녀관이 있던 정동은 궁궐과 외국공관이 즐비하던 ‘외교가(街)’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미 북감리회 여선교단은 더 가난하고 계층이 낮은 여성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병원이 필요했고, 1892년 성곽 옆에 볼드윈 진료소를 세웠다.
4년 간, 릴리안 해리스는 동대문에 있는 볼드윈 진료소에서 살면서 환자들을 돌봤다. 그곳에서 개인적인 삶이란 없었다. 진료소는 매일 문을 열면서 시약소가 아닌 병원으로 발전했고, 매일 위급한 환자들이 늘어갔다. 1899년 기록에 따르면, 1주일의 5일 진료를 하며 1년 간 본 환자만 630명이 넘었다. 릴리안 해리스는 “일손이 너무 달린다. 훈련된 간호사가 긴급히 필요하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릴리안 해리스의 의술은 조선 여성 환자들에게 ‘기적과 같은 선물’이었다. 많은 환자들은 릴리안 해리스에게 “인간의 힘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을 치료해내는 것을 봤다”며 “당신을 통해 신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 릴리안 해리스는 언제나 '의료 선교사는 의사이기 전에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며 환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1899년 릴리안 해리스가 직접 쓴 보고서 내용이다.
그들은 무척 가난해 하루 한 번 입에 풀칠하기에도 힘듭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 그들은 교회를 찾아옵니다.
한 노년의 부인에게, 더는 치료가 힘들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답했습니다.
'저도 제가 오래 살지 못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기에도 너무 아팠지만, 저는 교회에 가지 않고 하느님에 대해 더 알아 놓지 않으면,
신은 저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을 것이기에 이곳에 옵니다.'
얼마 후,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편은 신자가 아니었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남편은 얼마 후 또 다른 지인을 데리고 예배에 왔습니다.
1901년 5월 릴리안 해리스는 언니 메리안 선교사가 머물던 평양으로 옮겼다. 그곳 광혜여원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진료를 했다. 동료들이 쉬기를 권하면 "이곳 사람들을 위해서 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활동 틈틈이 교회와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환자들의 신앙 지도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릴리안 해리스는 티푸스에 걸린 여 환자를 치료하다 병이 옮았다. 마침 정례 회의를 위해 평양으로 모여들었던 미 북감리회 여선교단 소속 선교사들은 반갑게 만날 줄 알았던 릴리안 해리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릴리안 해리스가 치료한 여인은 살아났지만, 릴리안 해리스는 결국 1902년 5월 16일 소천했다. 그녀는 평양에 마련된 외국인 묘지에 처음으로 묻히게 됐다. 선교사 노블이 남긴 기록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병들고 죄지은 자를 위해 바쳤다.
티푸스 열병에 걸린 여인을 치료하여 그 여인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면서,
대신 그 여인에게서 질병을 얻었다.
그가 고친 환자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이상스럽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비천하게 보이는 자를 구원하였다는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다.
1907년 동대문 볼드윈 진료소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병원을 개축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보구녀관 의료선교사였던 엠마 언스버거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면서 모임을 열고 연설을 다니며 "한국 여성들을 위해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고, 그에 감동한 코웬(Mrs. Cowen)이라는 부유한 부인이 거액을 기부했다. 새로 짓는 병원에 코웬이라는 이름을 쓰려고 했으나, 코웬 부인은 한사코 거절하며 "해리스 의사의 이름을 써야 한다"고 했다. 언스버그의 말이다.
사랑과 희생의 상징인 병원 건립 자금은,
미국 신시내티 지부 소속 여성과 어린이들의 헌금으로 조성됐다.
조선에서 사랑과 희생으로 선교 사역을 하다 죽은 해리스 여사를
깊이 추모했기에 모금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