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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섬김과 나눔, 평화와 사랑이 가득했던 보구녀관,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의 크리스마스 풍경

파일 크리스마스.jpg       
작성일 2023-07-12 조회수 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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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학교 아이들의 크리스마스를 기쁘게 해준, 두 개의 미션 박스를 보내준 고향의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주 귀한 수술 기구들을 살 수 있게 해준 절먼타운 교회 친구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하자, 그들은 '편지를 보내 필요한 모든 목록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신년에는 한국 친구들이 우리에게 많은 음식을 주었기에

60명의 배고픈 아이들에게 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전 이것이 연례행사가 되길 기원합니다.

1913년 KWC 연례보고서에서,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메리 스튜어트 의사

고요하고 거룩한 성탄절의 축복은 한국 여성들을 위한 작은 병원에도 내려왔다. 1913년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책임의사였던 메리 스튜어트 보고서에는 크리스마스의 기록이 짧게 남아있다. 동방의 고요한 나라, 조선의 크리스마스를 위한 소중한 선물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배달됐다. 선교사들은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초대해 맛있는 저녁을 차려줬다. 병원을 위해 애써주는 경찰, 신자 등 이웃들도 초대했다. 아이들은 옷과 연필, 장난감과 사탕, 구충제 등이 담긴 선물꾸러미를 받았다. 크리스천의 사랑이 가득 담긴 구호품 선물 문화는 반세기 가까이 이어져 한국전쟁 이후에도 한국 아이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목욕’이었다. 당시만 해도 목욕, 특히 전신욕은 연례행사였다. 특히 추석 이후부터 이듬해 경칩까지는 거의 목욕을 하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더욱이 당장 먹고살 것도 없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목욕은 일종의 사치였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기생충도 많았다. 1919년 동대문부인병원에서 머물며 조선 풍속을 그린 영국인 작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책 ‘올드 코리아’에서는 한 의사의 말이 실렸다.


한국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기생충 때문이에요.

어떤 환자에게서 무지하게 큰 촌충을 빼주었고,

또 다른 환자에게서는 십이지장충을 무려 200여 마리 빼냈어요.

이 불쌍한 여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영양 부족과 몸속의 기생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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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업은 여인>, 1934. 동대문 부인병원에 머물던 영국 작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동대문 겨울 풍경

크리스마스를 맞아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에 모여든 아이들은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서 꼭 전신 목욕을 해야 했다. 간호사들은 먼저 아이들의 옷을 벗겼다. 워낙 기생충이 많았기 때문에 ‘옷 이랄 것도 없이 거적때기’였다고 한다. 이들은 더럽고 해충이 가득한 누더기 옷을 태워버리고, 즉석에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목욕과 비누가 낯선 아이들은 목욕하는 내내 악을 쓰며 울었다.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메리 스튜어트 의사의 소원대로 이는 연례행사로 이어졌고 1914년 75명, 1917년에는 80명 등 점점 많은 아이들이 초대받게 됐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옥분이의 이야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크리스마스트리’였다. 사실 트리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앙상한 나무와 저렴한 장식 몇 개에 불과했지만 조선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1910년까지 보구녀관에 머물며 전도하던 선교사 미네르바 구타펠의 책 ‘조선의 소녀 옥분이(1911년 출간)’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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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녀 옥분이> 옥분이는 양손을 절단했지만, 의지를 갖고 글씨를 쓰는 법을 배웠다.

여기 나오는 옥분이는 10살 남짓한 소녀다. 가난한 부모는 옥분이를 여종으로 팔았는데 고된 노동과 매질로 결국 두 손과 발을 절단했다. 1906년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옥분이는 구타펠 선교사에게 행복한 얼굴로 ‘저는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라고 소개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손과 발을 잘랐기에 고통도 잘려나가 더는 아프지 않을 것이고, 병원에 있는 동안은 매를 맞지 않았고 더는 배가 고프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옥분이는 덧붙였다.

선교사님,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인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전 크리스마스트리를 보았어요. 전 그렇게 예쁜 걸 본 적 없거든요.

하나님은, 손발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이 없고 발도 하나만 있는 나 옥분이도 사랑하신대요.

나는 진심으로 그걸 알아요.

볼드윈 예배당의 첫 크리스마스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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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드윈 진료소

1892년 성탄절은 우리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서울 동대문에 위치한 볼드윈 예배당에서 첫 예배가 치러진 날이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부 총무로서 동대문 여성사업을 위해 많은 기부금을 내어준 볼드윈(L. B. Baldwin) 여사의 이름을 딴 ‘볼드윈 예배당’은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200명 넘는 신도가 몰렸다. 성탄 예배에서 조선 소년, 소녀 총 6명이 세례를 받았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 뱅겔 선교사, 페인 선교사, 로제타 홀 등 조선에 머물던 감리교 여선교사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이 예배당의 특별한 점은, 남녀가 같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건축됐다는 점이다. 당시 스크랜튼 의사의 보고에 따르면, 예배당은 재단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져있었다. 남녀 동석은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았기에 남녀 신도가 서로를 볼 수 없게 중간에 병풍으로 막았다.

성탄절에 우리 작은 볼드윈 진료소에 집회를 가질 수 있게 됨을 크게 감사드렸다.

이 예배당은 비록 완성되지 못해 거칠었지만 우리에게는 대단히 웅장한 성전보다 좋았다.

같은 건물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이기를 시도한 것 때문이었다.

신도들은 서로 볼 수 없었지만 설교자는 모두 볼 수 있다.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정동 선교본부 예배실에서도 이렇게 모이기를 소망한다.

남녀가 동석하는 예배당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이날 한 여성 신도는 볼드윈 예배당에 와서 외국 남자(목사)의 얼굴을 처음 보고 깜짝 놀라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4년 전인 1888년 스크랜튼 대부인이 이화학당에 처음 부인교회를 설립했을 당시, 남성 목사를 못 보게 하려고 목사가 휘장 뒤에서 설교한 것에 비하면 얼마나 진보했는지 알 수 있다. 1892년 성탄절 볼드윈 예배당의 성탄 예배는 그 자체로 조선 여성들을 해방시킨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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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1913년 KWC 보고서

엘리자베스 키스 ‘올드 코리아’

미네르바 구타펠 ‘조선의 소녀 옥분이’

동대문교회100년사

General Commission on Archives and History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