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메리 스튜어트 병원장의 하루
환자 넘쳤지만 강인하고 의연하게 환자 치료
1918년 8월, 조선 내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잡지
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를 소개한다. 수 홉킨스(Sue Hopkins) 씨가 쓴 ‘메리 스튜어트 의사와 함께 동대문 병원에서 보낸 하루(A Day with Dr. Mary Stewart at East Gate Hospital, Seoul)’라는 제목이다. 4쪽 분량의 이 기사에는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메리 스튜어트 병원장의 열정적인 하루 일과가 고스란히 담겼다.
오전 7시 반 쯤 옷을 차려입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밤새 몰아친 폭풍우 때문에 지하실부터 체크합니다. 오전 9시 반 첫 병동으로 갑니다.
두 간호사가 아주 끔찍하고 전염성이 강한 질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무료 아동 병동에는 결핵 환자 2명이 있는데,
이들은 무릎이 좋지 않은 남자아이와 엉덩이 상태가 나쁜 여자 아이입니다.”
1918년은 모두에게 암흑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했지만 전쟁의 상흔은 승전국, 패전국 할 것 없이 처참하게 남았다. 세계적으로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면서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스페인 독감은 일제 치하 조선땅까지 전파되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의 40% 가량이 스페인 독감에 감염됐고, 이 중 14만 명이 사망했다. 일제의 무단 정치 10년에 고통 받던 조선인들은 독감 방역 실패까지 경험하며 일상적인 죽음을 목격했고 분노에 빠졌다. 이 응축된 에너지가 훗날 1919년 3.1 독립운동으로 터져나왔다는 해석도 있다.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메리 스튜어트 병원장은, 이런 소요 속에서도 강인하고 의연한 태도로 조선 여인들과 아이들을 치료했다. 메리 스튜어트는 1911년 미감리교 의료선교사로서 조선에 파견됐다. 메리 커틀러와 함께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막바지 공사를 마무리했고, 1912년에는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초대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그 후 메리 스튜어트는 1935년 은퇴 후 귀국할 때까지 안식년을 제외한 대부분을 동대문에서 보냈다.
조선인을 훌쩍 뛰어넘는 큰 키와 당당한 자세. 메리 스튜어트는 항상 자신감 넘치는 여장부였다. 수 홉킨스는 위의 기사에서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고 울고 신음해도 의사선생님은 절대 중심을 잃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1919년 동대문부인병원에 머물며 조선 풍경을 그렸던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자매의 기록을 보자.
병원장 메리 스튜어트는 미국 캔자스 주 출신 여의사였다.
자기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진 만큼 편견도 있었지만, 동시에 남이 가지지 못한
용기, 근면, 그리고 깊은 신앙심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었다.
거실에는 항상 성경이 펼쳐져 있었으며 매일 성경을 읽고 그날의 행동 지침을 삼았다.
메리 스튜어트는 어느 날, 자신과 동료들이 우리를 내심 경계했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서울의 외국인 공동체 내 영국에서 온 두 여자(엘리자베스 키스와 그의 언니)가
일본 정부의 첩자라는 소문이 확 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리는 ‘너희가 첩자라고 내가 겁낼 줄 아느냐.
만약 첩자라면 나한테 단단히 혼이 나고 말 걸’하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하지만 첩자 이야기가 사실무근이라는 게 자연스레 밝혀졌고, 이후 재미있는 농담이 되었다.
기록 속 1918년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은 100년 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이다. 당시 지하실과 1,2층을 병원 건물로 쓰고 있었는데 내부는 일반 병동, 외국인 병동, 아동 병동, 약제실, 진료 및 치료실, 회복실, 세탁실 등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아기병동 내에는 1인용 침대가 가득 차 있었고 각 병동, 치료실마다 담당 간호사가 상주했다. 지나치게 지저분한 환자들을 진료 전 목욕시키는 '목욕실(사회복지실)'까지 있었다.
특히 기부병동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포도주스 회사 웰치’의 기부금으로 조성한 병동은 ‘웰치 병동(Welch Ward)’이라고 불렀다. 1869년 미국의 웰치 의사는 성서 속 포도주에 대한 이중 잣대에 대해 고민하다 ‘취하지 않는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웰치 포도주스가 출시됐을 때 사람들이 ‘신의 축복’이라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먼 미국 땅의 식품기업, 웰치가 어떤 인연으로 고요한 조선 땅의 여성 병원에 기부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기록에 따르면, 웰치 병동은 일종의 중환자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고관절 탈구로 40일 넘게 투병한 여인과 방광 통증으로 고통 받던 젊은 여성 환자, 곤충이 폐로 들어간 여성 환자 등 수술로 회복중인 환자들 등 비교적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이 웰치 병동에 머물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외래 환자들의 질환과 상태는 다양했다. 심장병이 심한 여성 환자는 손이 붓고 피부가 검어져서 병원을 찾았다. 종기가 네 개나 난 남성, 열흘 넘게 편도선이 부어있던 여성, 분비선 염증으로 간지럼증을 느끼는 환자 등이 있었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다 감염된 여승도 왔다.
수 홉킨스의 기록에 따르면, 메리 스튜어트 병원장은 한 시간에 20명도 넘는 외래 환자를 돌보았다. 외래가 마감한 저녁 6시 후에도 환자들이 몰려들어 결국 9시에야 진료가 마감됐다. 하루 14시간도 넘게 이어진 진료와 병원 경영. 미국에 비해 열악한 근무 환경과 인력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메리 스튜어트는 전염병 환자를 쓰다듬어 주고, 오랜만에 온 환아에게 방긋 웃어주며 따뜻한 진료를 이어갔다. 그리고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기도와 함께 감사하며 하루를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