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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조선인 최초의 동대문부인병원장 안수경

파일 안수경.jpg       
작성일 2023-07-12 조회수 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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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들을 상대로 18년 간 꾸준하게 사람을 살리는 천직을 가지신 부인의사가 계십니다.

개인으로 개업해 내 병원을 가졌으면 일평생을 간대도 신기할 것이 없지마는

외국 사람이 경영하는 병원에서 18년을 하루같이 지내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못할 것입니다.

현재 동대문부인병원장으로 계신 안수경 의사를 찾았습니다.

1935년 4월 6일 동아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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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경

1918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제2회 졸업식. 47명의 졸업생 중 3명은 여성이었다.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 등 세 조선인 여성이 이 땅에 서양의학이 뿌리내린 지 32년 만에 조선에서 의학사 자격을 획득한 것. 조선인 여의사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던 메리 커틀러는 “작은 도토리에서 큰 참나무가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로제타 홀의 소개로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청강생이 된 김영흥, 김해지와 달리 안수경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 추천으로 의학의 길을 걷게 됐다. 안수경의 부친 안왕거는 구한국 시의(醫)였다는 설과 교육가였다는 설이 있다. 안수경의 남자 형제인 안광천(안효구)는 경성의전을 졸업했다.

안수경은 의사 면허를 딴 후 메리 스튜어트 병원장이 이끌던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외국인 의료 선교사들 사이 조선인 여의사, 안수경은 조선 환자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가정 분만이 일반적이던 분위기 속에서 산부인과 의사 안수경을 믿고 동대문 부인병원을 찾는 조선인 산모들이 늘어갔다. 이는 안수경 의사의 침착하고 자애심 넓은 성품 때문이기도 했다. 1924년 조선일보 기사에는 안수경 의사에 대해 “자그마한 키에 단정한 자세를 가진 이 부인에게서 받는 첫 인상은, 맑고 흰 이마와 안경 밑에 빛나는 두 눈이 어디까지나 총명한 것이, 거울 같은 마음의 맑음을 보여주었다”라고 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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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학전문학교가 배출한 최초의 여성 의사들과 로제타 홀, 메리 커틀러(뒷줄 왼쪽부터). 김해지, 김영흥, 안수경 (앞줄 왼쪽부터)

안수경은 조선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 활동도 했다.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내에 무료 환자 해산실을 만들어 가난한 여성들이 안전하게 출산하고 산후조리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으며, 1926년 6‧10 만세 운동 당시에는 시위 참가자 여성들의 안위를 위해 류영준 정자영 김순복 등과 함께 위생반으로 출장을 나가기도 했다. 소요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우려보다, 조선 여성들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경력이 쌓이면서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내 안수경의 역할은 커져갔다. 1925년 W.F.M.S.에 제출하는 연례 보고서는 안수경이 직접 작성했다. 당시 안수경은 조선 내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았다. 서울에서 300마일 떨어진 곳의 응급 환자를 치료했는데, 그 여성 환자는 병원에 치료비 및 기금 40원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다. 안 의사가 “왜 위급 상황에서 근처에 있는 남성 의사에게 연락하지 않았냐”고 묻자, 환자는 “남성 의사에게 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답했다. 조선에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녀관이 설립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더 많은 여의사, 특히 조선 여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의사가 된 저로서 제일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직까지

일반 가정에서 병원에 대한 신망이 두텁지 못한 결과 병원에만 데리고 오면

가히 살아날 수도 있는 병자까지 참혹한 주검이 되게 하는 줄 알고

나중에는 반드시 '팔자를 하는 수 있느냐''하는 한마디 한탄으로

끝을 막아버리는 일이 올시다.

저는 특히 젊은 며느리를 두신 모든 시어머님께 먼저 미신을 깨치어

병원의 긴요함을 아시며 사람의 목숨을 염려하시어

며느님 중에 태기가 있는 눈치가 있거든 지체말고

산파나 의사를 청하야다가 뜻밖의 불행을 면하시도록

하야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올시다.

1931년 1월 5일 매일신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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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 회갑을 기념해 조선인 여의사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1928년). 오른쪽 두 번째 앉은 이가 안수경이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압력으로 버나티 블록 등 의료 선교사들이 귀국한 후에도 안수경은 동대문부인병원을 지켰다. 이후 기록에서는 안수경이 1942년 서울에 ‘안 산부인과’를 개업했다는 기록과 1947년 해방 후 결성된 서울보건부인회의 창립에 힘을 보탰다는 기록까지만 남아있다. 20년 넘는 세월을 동대문에서, 조선 여성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안수경 의사를 기리기 위한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댁이 낙원동에 있는 줄 아는데 댁에는 몇 시 쯤 가십니까"


"저는 집에는 못갑니다.

일요일 오후에 손님처럼 잠깐 다녀오고

그 외에는 병원에서 유숙하고 있으며

도 일어나고 새벽에도 일어납니다.

저는 세상일은 도무지 모릅니다.

최선을 다하여 죽어가는 여러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는 것이 나의 직무이니

세상은 그저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1935년 4월 6일 동아일보 인터뷰 중

external_image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간호사들(1924년). 왼쪽은 현덕신 의사.

참고 문헌

1. 권복규, 보구녀관 최종보고서, 2018

2. 이영아, 최초의 국내파 여의사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 2021

3. KWC 연례보고서, 1925

4.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