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아픈 사람은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42년 간 조선 여성을 위해 헌신한 메리 커틀러
커틀러 의사는 의사이며 건축가일 뿐 아니라 가슴이 넓고 유능한 여성으로,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시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다.
1921년 W.F.M.S. 개인 신상 카드 중에서
42년간 조선 여성들을 위해 헌신한 의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는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던 아버지, 존 아이작 커틀러의 영향을 받았다. 메리 커틀러는 ‘여성 스스로 삶을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1884년 남녀공학인 미시간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여성으로서 미시간 의과대학 진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남녀공학 의학교육이 시작된 건 불과 10여 년 전인 1870년이었고, 그마저도 강의실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을 나누어 수업했다. 일부 과목은 여학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수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메리 커틀러는 이에 맞서기 위해 대부분 여성 의학생이 산과(産科)를 택하는 것과 달리 내외과(內外科) 전공을 택했다. ‘여성 의사는 여성 환자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1893년 조선에 도착한 메리 커틀러는 간호사 엘라 루이스와 함께 보구녀관을 책임졌다. 보구녀관의 유일한 의사였던 메리 커틀러는 진료뿐 아니라 각종 병원 업무, 간호사, 병원 재산에 대한 보수까지 맡았다. 메리 커틀러는 아예 보구녀관에 상주하면서 열정적으로 진료에 임했다. 한양 밖 35리까지 왕진 가는 일도 허다했다. KWC 보고서에 따르면 메리 커틀러는 일주일 동안 산고에 고통받는 여성을 구하기 위해 20마일 넘게 달려가 “외국인에게 치료받는 것이 죽음보다 부끄럽다”며 거절하는 산모를 끝까지 설득해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1900년, 첫 안식년 휴가를 맞은 메리 커틀러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조선 의료 선교를 위해 일했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조선의 의료 상황에 대해 연설했고, 오하이오에서는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간호사 양성을 맡아줄 간호원장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내용의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들은 간호사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가 W.F.M.S.에 지원을 했고, 1903년 두 사람은 함께 최초의 간호원 양성학교인 보구녀관 간호원 양성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조선 최초의 간호원 양성 교육에는 학교 설립 후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실질적인 간호원 양성 교육을 수행한 마가렛 에드먼즈의 공로가 가장 크지만, 메리 커틀러의 초기 구상과 노력,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조선인 의료인 양성은 메리 커틀러의 꿈이자 목표였다. 로제타 홀과의 협력으로 의학생 교육, 의학강습반 개설 등을 진행하고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 등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청강 편입을 이뤄낸다. 메리 커틀러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모범이 훈시보다 낫고,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믿음으로 여자 의학교 설립 및 여성 의사 양성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20명의 학생이 의학 교육을 받는데는 연간 3천 달러가 듭니다.
매년 4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어 1천만 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치료할 수 있다면 큰 액수가 아닙니다.
현재 한국에는 인구 2만 5천명 당 의사가 1명 뿐이고, 대부분 중심지에 개업했습니다.
전국에 여의사는 8명, 여성 병원은 두 곳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병원과 의사가 필요합니다.
1919년 KWC 보고서 중에서
1925년 예순의 메리 커틀러는 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미국 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포드 트럭 한 대를 가지고 온 것. 커틀러는 이 차를 개조하고 양옆에는 ‘건강, 교육, 기독교진료소’라고 한자와 한글로 적어넣었다. 주차할 수 있도록 광혜여원에는 차고지까지 만들었고, 운전사와 간호사 등 총 4명이 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아파도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기 위한 ‘순회 진료소 사업’이었다. ‘아픈 사람이면 누구나 의료 혜택을 받아야 하고, 의료 혜택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메리 커틀러는 1939년 귀국하면서 재산 대부분을 나눠주고 거의 빈손으로 돌아갔고, 1948년 소천했다. 메리 커틀러가 보여준 도전적 여성의식과 희생 정신, 강인한 추진력은 현재의 이화의료원이 존재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참고 문헌
-백옥경, 한국 근대 초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의 진료활동과 여성의학교육, 2021
-KWC 보고서
-옥성득, 한국간호역사자료집, 대한간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