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반헌경, 이화여대 최초의 박사. 사랑을 나눈 안과의사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 두 명이 배출됐다. 놀랍게도 두 명 모두 의과대학 소속이었다. 그중 한 명인 반헌경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병들어 불쌍한 사람들과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도 방학 때마다 농어촌 계몽 활동에 나갔다.
1951년 반 선생은 이화여대 의대 1회로 졸업했다. 당시 전쟁의 발발로 이화의대는 부산 피난지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이어나가던 상황이었다. 얇은 판자로 교실 칸막이를 세워 옆 교실의 소리와 바깥 소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1회 졸업생 24명은 졸업식도 없이 졸업장을 전달받았다. 훗날 이화의대 임상병리학 교수이자 한국여의사회장을 맡았던 권분이 선생, 반 선생과 함께 이화여대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 타이틀을 거머쥔 김혜창 선생 등과 함께였다.
안과 전공이었던 반 선생은 졸업 이후 동대문 부속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전쟁 이후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하고 지저분한 위생, 보건 문제 등으로 시각장애를 앓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과 의사였던 그는 진료시간 이외에는 서울 시내 보육원, 주말에는 의학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농어촌을 찾아다니며 진료를 이어나갔다. 반 선생이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백 속에는 항상 약과 수술 기구가 들어있었다. 반 선생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3.1절 공적을 인정받아 전국선행자 표창위원회 선행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63년 2월 25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10여 년 동안 반헌경 선생이 눈뜨게 한 시각장애인이 5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
산골에 들어갔을 때였다. 의사라곤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은 거의 모두 영양부족이고 병에 걸려있어 1주일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침식을 잊고 치료하고 난 다음 그만 지쳐 쓰러져버린 반 박사였다. "같은 우리 민족 가운데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도 있구나"하고 생각할 때 서글픔과 함께 무거운 책임을 다시 통감했다는 것이다.
반 선생은 1956년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동물들의 각종 안구를 연구했다. ”바닷속 깊숙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고기(어류) 눈의 성능, 몇십 리 밖까지 환히 볼 수 있는 새 눈의 기능“ 등 각종 동물의 우수한 특질을 연구하기 위해 반 교수는 새벽 도살장으로 가서 갓 잡은 소 눈을 20~30여 개씩 사 오거나, 고향 대구까지 내려가서 초등학생들에게 돈을 주고 메뚜기 눈을 구하기도 했다. 제자들과 함께 연구실에 모여앉아 민물고기, 바닷고기, 곤충들의 눈알을 빼내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얻은 온갖 눈들을 실험 전 냉장고에 넣어두더라도 빈약한 전기 사정으로 인해 정전되어 썩기 일쑤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6년간의 연구를 이어나가 반 선생은 결국 박사학위를 받게 됐다.
1963년 반헌경 선생은 이화여대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 9월 8일 반 선생은 미국으로 떠났다. 미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에서 안과 공부를 계속하기 이어서였다. 그날 반 선생은 떠나기 전날까지 환자를 돌보느라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해 모친에게 짐을 부쳐달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 그날 공항에는 반 선생을 통해 개안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많이 배웅나왔다. 13년 전 폭발 사고로 실명했다가 반 선생의 개안 수술로 시력을 되찾은 이익순 씨도 함께했다. 시각장애를 앓는 채 홀어머니를 모신다는 사연을 듣고 반 선생이 수술비 절반을 사비로 지원했던 환자였다.
출처
조선일보, 1964.09.09.
<처 여인과 박사 미국으로>
조선일보, 1964.07.05.
<눈을 연구, 집념 6년 마침내 보람 맺어 처녀 박사>
동아일보, 1963.2.25.
<31절 표창 시내 선행자는 80명>
경향신문, 1963.2.25.
<이대 박사 제1호>
동아일보, 1962.3.9.
<눈뜨게 된 눈먼 세 고아, 대관령 넘은 인술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