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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로제타 홀이 세운 또 다른 W.F.M.S.병원, 인천부인병원

파일 인천부인병원.jpg       
작성일 2023-07-12 조회수 2,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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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은 1921년 인천시의 한가운데에 있는 어느 낡은 한식 여관을 사들였다. 1890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땅에 들어온 지 30여 년, 로제타 홀의 나이 56세 때다. 로제타 홀은 그 이름을 제물포 여자 시료소(The Chemulpo Women’s Dispensary)라고 지었다. 당시의 상황은 1921년 10월 30일 동아일보 기사에 잘 담겨있다.

조선은 본래 남녀의 분별이 심하여 가족끼리도

서로 얼굴을 맞대기를 불허하는 습관이 있어

불행 질병에 고통받을 지라도 비상한 위증이 아니면

남자 의사의 진찰을 허락하지 않는 터.

경성 동대문 내 홀병원(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 병원장 홀 부인은

인천에 부인병자 구원기관이 없음을 개탄하여

인천부 율목리에 부인의원을 설립하고.

부인사회에 다대한 편의를 보급하던 김영흥 여의사를 청빙하야 목하 개업 중인바.

이 병원과 관련하여 ‘미국부인 전도회(W.F.M.S.)에서 평양에는 광혜여원, 경성에는 동대문부인병원을 세워 일반 부인환자들을 치료하더니 이번에는 인천 율목리에 부인병원을 신설하고’라고 언급한 것(1921년 7월 4일 동아일보 <인천에도 여의원>기사)을 통해 인천기독병원이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의 분원 성격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로제타 홀이 병원장을 맡고 총독부의원 청강생 출신으로 평양에서 개원하고 있던 김영흥 의사가 함께 근무했다. 언덕 위 낡은 초가집이었던 병원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인천과 주변 섬지역, 경기도, 나아가 충청도 지역의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1926년 W.F.M.S. 보고서에 따르면 ‘의약품과 건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간 5천여 명의 환자가 진찰받고 약을 처방받았으며 ‘천 의사(Dr. Chyun)’가 로제타 홀을 도와 근무했다. 1928년 보고서에 따르면 병원 내 매주 월요일마다 유아클리닉, 강습회 등을 진행했고 김영흥과 마찬가지로 총독부 병원 청강생 출신인 김해지가 근무하기도 했다. 1931년 보고서에서는 김해지 등 근무하는 의료인들을 ‘찬란한 직원들’이라고 표현하며 ‘인천 지방 부녀자들은 이 작은 병원으로부터 몸과 정신 모두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인천부인병원은 1952년 5월 인천기독병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재오픈을 하게 되고, 이후 미국감리교여선교회 해외선교부에서 학교법인 새빛학원으로 소유권이 이전,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