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1920년대, 동대문부인병원의 세브란스 합병을 막아낸 여의사들
1920년대, 동대문부인병원에 어려움이 닥쳤다. 일제강점기라는 정세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다. 당시 경제적으로 힘든 환자들에게는 비용을 받지 않고 치료해주다보니 W.F.M.S. 등의 지원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대문부인병원은 로제타 홀의 지휘 아래 현덕신, 안수경 등 의학 교육을 마친 조선인 여의사와 가장 오랜 기간 동대문부인병원을 지킨 메리 스튜어트 의사 등이 함께 근무하며 수많은 여자, 아이 환자를 돌봤다. 1887년 보구녀관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여성 전문 의원으로서 역할을 한 지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성 의료의 길은 어려웠다. 조선일보 1924년 11월 28일에 실린 기사를 보면 당시 안수경 의사가 어떻게 진료를 이어갔는지 알 수 있다. 돈 없어 고생하는 환자들을 무료로 돌봐주고 심지어 '무료 환자 해산실'까지 설치해 도우면서도 여전히 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비참한 생을 마감하는 여인들이 많은 현실이었다.
하루에도 삼십 여 명 씩이나 들어오는 환자-난산이 되어 애쓰는 부인들과
생식에 병이 있어 잉태치 못하는 불쌍한 여자들에게
더 할수 없는 은인이 되는 것이요.
특별히 그는 돈 없어 고생하는 무료 환자들에게
가장 정답고 친절하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는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가련한 여자들이
길가에서 방황하며 치운 일기에 해산을 하다가
산모와 어린아이가 원망의 피눈물을 머금고
노상에서 일생을 그대로 마치는 일이
비일비재 할 뿐 더러 설마 그들이 무사히 해산을 하고
두 몸이 다 살아난다 할지라도
평생토록 병신을 면치 못하는 이를 위하여 비록 그다지 크지는 못하나
현재 동대문부인병원 안에 설치해 놓은 무료 환자 해산실이
비이지나 않도록 산모들이 와준다면...
조선일보, 첫길에 앞장선 이들 '수녀같이 숨어서 병자를 구원하는 동대문부인병원 의사 안수경 양'
그러던 1925년 해외 선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미 감리교에서도 지원 경비를 축소하겠다고 나섰다. 이어 동대문부인병원을 세브란스 병원과 합병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1925년 5월 19일 기사에는 "(동대문부인병원은) 미 감리교 경영으로 30년이나 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조선 부인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실로 대단한 편의를 제공했지만 미 감리교 경비가 축소된 관계로 남대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과 합동하기로 내정됐다"고 보도됐다. 말은 합병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세브란스 병원 내 산부인과 하나를 설치하는 모습으로 '흡수 합병'하는 형태였다.
동대문부인병원을 일구고 지켜온 여의사, 간호사 등 관계자들은 즉각 반대했다. 당시 동대문부인병원장을 맡고 있던 로제타 홀은 "내가 조선에 온 지 35년 동안 여자 의학계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럼으로 앞으로는 더 확장하려는 이때에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은 불상사"라고 반대했다. 또한 이전의 평양의 사례를 통해 합병의 효율성을 비판했다. 평양의 남녀병원(광혜여원)이 1923년 기홀병원과 연합,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운영되었는데 부인 병원이 따로 있는 것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것. 홀은 "이번에 합한다는 것은 부인 의학계의 큰 불행이므로 '필사의 노력을 다 해 반대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동경 여자의과대학을 마치고 당시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근무하던 현덕신 역시 동대문부인병원은 영리가 아니라 빈민의 생명을 구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돈이 있는 사람도 국민이요 돈이 없는 사람도 국민이니 귀중한 생명을 서로 아껴주는 평등한 권리로 병을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본 것. 현덕신의 주장은 100년이 지난 지금의 관점에서 살펴보아도 매우 선진화된 보건 의료의 방향성을 담았다. 이와 더불어 동대문부인병원의 산부인과의 설비나 그 역사로 인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경성에 있어서는 실로 막대한 사회적 의미가 있고 그 수용력 역시 어느 병원에 비해 역사적 일조가 있다는 주장도 일리를 얻었다.
이처럼 합병 반대의 뜻을 모아 '동대문부인병원 폐지반대연맹회'가 설립됐다. 1925년 5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내용이다.
"동대문 안에 있는 동대문부인병원을 세브란스 병원과 합동하기로 미 감리교 경영당국에서 내정하였음에 대하여 조선부인계에서 그 부인병원의 폐지는 여러가지 의미로 조선의 큰 손실이라 하여 동대문부인병원 폐지반대연맹회를 조직하고 폐지반대 운동에 노력한다 함을. 해당 폐지반대 운동에 참여한 단체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 여자청년회, 동대문의약간청년회, 간호부회, 산파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여합회 등 단체였다. 유영준, 정자영, 윤보명, 안수경, 현덕신 등이 발표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동대문 부인병원을 폐지하거나 혹 남자측에 경영권을 이전하는 것은 조선의 현재 사정에 조하여 실로 시대역행의 오계(잘못된 계획)이며 더욱
여자계에는 막대한 손실로 인정함으로 우리들은 조선여자의 기독교적 사업의 진보향상을 위하여
철저히 반대함
결국 강한 폐지 반대 운동을 바탕으로 동대문부인병원은 합병이 무산되었고 지속적으로 W.F.M.S.의 보조를 받아 운영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여성 의사를 독자적으로 배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 향후 경성여자의학강습소 등 여의사 교육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4년, 결국 경비곤란으로 인해 점차 보조금액은 줄어들었고 1936년 결국 지원금이 끊기면서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