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스크랜튼 모자의 동대문 사역 공간 확보 과정
따사로운 봄볕과 함께 한양도성 구간을 산책하기 좋은 5월이다. 한양도성 구간 가운데서도 가장 탐방 난이도가 낮은 낙산 구간 시작 지점인 흥인지문 공원 언덕에는 옛 이대동대문병원 건물 일부(현 서울디자인지원센터)가 남아있다. 136년 이화의료원의 역사 중 26년간의 정동 보구녀관 시절이 뿌리라면 116년의 시간을 보낸 동대문 구역은 단단한 중심 줄기를 형성한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화의료원의 동대문 지역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892년 성탄절 동대문 성벽 안쪽 기와 지붕에 벽돌로 지어진 한옥 건물에서 윌리엄 스크랜튼(W. Scranton)의 주관으로 남녀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비록 가운데에 남녀 자리를 구분하는 칸막이는 있었지만 조선 땅에서 남녀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첫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일이 일어난 곳은 동대문 볼드윈 예배당으로 위 사진의 빨간색 네모 속 건물이다.
1885년 조선에 들어와 정동에서 시병원을 운영하며 의료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크랜튼 의사 겸 목사는 1887년 여름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을 세우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한양과 그 주변 공간들을 살펴본 결과 서대문 밖 애오개, 동대문 성벽 안쪽 언덕, 남대문 시장 세 곳이 자신의 뜻에 부합한 공간들이란 결론을 내렸다.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에 대한 선교본부의 승인을 얻은 스크랜튼 의사는 본격적으로 부지 매입에 나섰고 1888년 애오개, 1890년 남대문, 그리고 1892년 마지막으로 동대문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동대문 안쪽 지역은 훈련원, 하도감 등의 군사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조선 초기 국가는 군인들에게는 월급조로 최상급의 면포를 주었지만 세월이 흘러도 봉급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군인들의 생활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미봉책으로 군인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이들은 봉급으로 받은 면포를 가공해 섬유 상품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또 동대문 밖에는 넓은 밭이 있어 도성 안에서 소비되는 채소와 과일들을 재배·판매하여 근근히 먹고사는 가난한 백성들이 흥인지문 안팎으로 많이 모여 살았다.
이처럼 생활이 힘든 백성들이 살고 있던 동대문 지역은 스크랜튼이 추구한 ‘선한 사마리아인’ 선교 사업을 진행하기에 적합했던 공간이었다. 스크랜튼이 동대문에서 주일 집회를 실시하자 어머니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대부인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이화학당의 설립자이자 조선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인 보구녀관이 설립되는데 기반을 마련한 스크랜튼 대부인은 1892년 아들이 확보했던 기존 동대문 성벽 바로 안쪽 부지의 서쪽 도로변에 위치한 1천평 이상의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가을부터 그곳에 진료소와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대문에 지어진 진료소와 예배당은 'Baldwin Dispensary', 'Baldwin Chapel'이라 명명되었는데 당시 선교사들은 이 공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볼드윈 예배당이 동대문에 건축중이다. 이것은 오하이오에 사는 여성의 선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였다. 예배당과 연계하여 진료소도 있는데 여성 의사가 맡고 있다. 이것은 금년 연회 이후 시작한 신규 사역이다.
(W.B. Scranton's letter to Dr. A.B. Leonard, 1892.12.21)
이 예배당(볼드윈 예배당)은 한국 여성 사역을 위해 처음 돈을 기부했고, 이 예배당 건립에 돈을 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볼드윈 여사의 선물을 기념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Baldwin Chapel', Anna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i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93
이 진료소(볼드윈 진료소)는 그것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고, 한국 여성들을 위한 일을 시작하는데 첫 기금을 낸 여성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
R.S.Hall, 'woman's medical mission work in seoul, Korea', Heathen Woman's Friend, 1893.7
즉,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살던 볼드윈(L. B. Baldwin)이라는 여성이 스크랜튼 대부인이 확보한 동대문 부지에 지어지는 예배당과 진료소에 기부를 했기 때문에 그녀를 기념, 기억하기 위해 예배당과 진료소에 볼드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기록에도 언급되었듯이 볼드윈 여사의 이 기부는 한국을 위한 첫번째 기부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1883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한국 선교를 위해 언젠가 써달라며 88달러를 기부를 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종잣돈이 바탕이 되어 1885년 스크랜튼 대부인이 한국에서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스크랜튼 모자가 확보한 동대문 지역 부지의 정확한 위치와 면적은 1912년 《토지조사부》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2년 《토지조사부》를 보면 종로6정목 65번지 827평의 소유자는 감리교회, 72번지 1,933평 소유자는 미국감리교회부인선교부로 나와있다. 또한 1913년 당시 경성부 종로6정목의 《지적원도》를 살펴보면 65번지와 72번지에 번지수와 함께 교회 소유라는 敎(교)라는 표기가 병기되어 있다.
1913년 《지적원도》 중 종로6정목 일부 지역. 윌리엄 스크랜튼이 매입한 65번지가 한양도성 성벽과 맞닿아 있고, 65번지 서쪽으로 스크랜튼 대부인이 매입한 72번지가 있다.
스크랜튼 모자의 동대문 지역 부지 확보와 볼드윈 부인의 건축 기금 기부는 한양 도성 서쪽에 있던 보구녀관에서 시작된 여성과 아동에 대한 전문적인 진료가 반대편인 동쪽 지역으로 확대·성장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실질적인 이대동대문병원의 출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화의료원 동대문 지역 역사를 기억함에 있어 이 공간을 마련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스크랜튼 모자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