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모두가 슬픔을 감추지 못했던 릴리안 해리스의 마지막 떠나는 길
1885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가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 여사를 한국 선교를 위한 첫 선교사로 파견한 이래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추가 파송이 이루어지며 1899년 한국지부 선교사들의 첫 연례회의(Annual meeting)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연례회의는 해마다 서울, 평양, 제물포 등지에서 개최되었는데 1902년의 연례회의는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이에 서울에서 활동하던 페인(Josephine Paine), 프라이(Lulu Frey) 등의 선교사들은 5월 10일 토요일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평양으로 떠났다.
이들은 평양으로 향하는 배에서 당시 평양 지역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의사 릴리안 해리스(Lilian N. Harris), 선교사 에스티(Ethel Estey), 밀러(Sara Miller) 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에 한껏 기분이 들떠있었다. 이들이 탄 배는 12일 월요일 낮 12시경 평양에 도착하였고 모리스(Charles D. Morris) 선교사가 이들을 마중나왔다. 그런데 이들은 모리스 선교사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으니 그것은 바로 해리스 의사가 발진티푸스(Typhus fever)에 걸려 상태가 위중하다는 비보였다. 이들은 과도한 업무로 심신이 지쳐있는 해리스 의사가 이 병을 쉽게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 더욱 슬퍼졌다.
릴리안 해리스는 1865년 1월 23일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나 189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한 후 신시내티여자의과대학, 펜실베니아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되었다. 이후 1897년 W.F.M.S. 선교사가 되어 한국 의료 선교의 임무를 받아 11월 10일 한국 땅에 발을 내딛었다. 그녀는 오자마자 정동 보구녀관에서 환자 진료를 시작하여 1898년 4월까지 일했으며 이후 볼드윈진료소 전담 의사로 임명받아 동대문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당시 볼드윈진료소는 1893년 3월부터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이 정식으로 진료를 시작했지만 이곳을 전담하여 운영하는 의료 선교사가 임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동 보구녀관에서 근무하는 로제타 셔우드 홀이나 메리 커틀러(Mary Cutler) 의사가 틈이 날 때마다 볼드윈진료소를 오가며 환자들을 돌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898년 한국에 로제타 셔우드 홀, 메리 커틀러, 릴리안 해리스 3명의 의사가 상주하게 되어 이들이 각각 평양, 보구녀관, 볼드윈진료소를 전담·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릴리안 해리스의 볼드윈진료소 임명으로 볼드윈진료소는 주5일 규칙적으로 병원을 열어 환자들을 진료하며 진료소 운영의 체계를 잡아갈 수 있었다. 2년 동안 볼드윈진료소를 맡았던 릴리안 해리스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떠나는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를 대신해 1901년 5월 평양 광혜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환자 진료에 열성을 다하며 평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릴리안 해리스는 1902년 5월 초 어느 날 병원을 찾아와 아픈 딸을 봐달라며 왕진을 요청하는 한 노파의 청을 듣고는 주저없이 그집을 찾아갔다.
낡고 허름한 오두막집 바닥에 멍석을 깔아놓은채 혼수상태에 빠져 누워있던 여인은 발진티푸스 환자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릴리안 해리스는 오직 환자를 살리는데만 집중하였고, 다행히 환자는 해리스 의사의 진료덕분에 살아났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서 릴리안 해리스는 그만 환자의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다. 당시 평양에 있던 감리교의 폴웰(D. Follwell, 언니 메리 해리스의 남편) 의사와 맥길(W.B. McGill) 의사, 장로교의 웰즈(J.H. Wells) 의사가 릴리안 해리스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지만 이미 그녀의 상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평양에서 사역활동을 하던 선교사 에스티와 전도부인 수잔이 해리스 옆에서 밤낮으로 그녀를 돌보아주었다.
연례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에 모인 선교회 회원들은 기적적으로 그녀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연례회의 개최일로 예정되었던 5월 16일 금요일이 되었다. 회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슬픈 마음을 애써 누른채 연례회의를 시작하였다. 릴리안 해리스는 오후 내내 잠들어 있었는데, 그녀의 언니로 릴리안 해리스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사역 활동을 하고 있던 폴웰 부인(메리 해리스)은 “제 생각에 릴리는 마지막 잠에 빠진게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해리스 의사는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 혼수상태에서 잠시 깨어나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위를 응시하며, “아름답다! 아름답다!(Beautiful! Beautiful!)”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해리스 의사는 연례회의 후 언니 폴웰 부인과 함께 노모가 기다리고 있는 미국 오하이오 집으로 안식년 휴가를 다녀올 예정이었다. 아마도 해리스 의사의 어머니는 머나먼 타국으로부터 전해진 딸의 사망 소식에 가슴이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릴리안 해리스 죽음은 한국에 파견된 W.F.M.S. 선교사들 가운데 선교지에서 사망한 첫번째 사례였다. 노블(W.A. Noble) 목사가 손수 관을 만들었고 밤새도록 자매들은 흰 비단으로 수의와 관 덮개와 안감을 준비하였다. 해리스의 시신이 놓인 흰색 관이 병원 현관 앞에 놓이자 그 주변으로 그녀의 자매와 형제,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슬픔을 보였던 이들은 그녀의 죽음에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인 한국인 무리였다. 이러한 장면만으로도 해리스 의사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한국 환자들의 치료에 매진하였었는지, 그녀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다음날(17일) 아침 노블 목사의 주관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고 연례회의는 중지되었다. 한국어와 영어로 찬송가가 울려퍼졌으며, 한국인 12명이 대나무로 만든 상여에 관을 메고 성문 밖으로 나갔는데 수많은 한국인과 외국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의 시신이 내려진 곳은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답고 조용한 언덕으로 그곳에는 이미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 세 기가 있었다. 해리스의 관이 흙으로 덮일 때 한국인들은 통곡하였다.
환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았던 해리스 의사의 숭고한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며 귀감이 되었고 이후 서울 동대문에 새로 지은 병원의 이름은 그녀의 행적을 기억하기 위해 릴리안해리스 기념병원(Lilian Harris Memorial Hospital)로 명명되었다. 하나님 다음으로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했고,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환자들을 진료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릴리안 해리스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그 위에 지금의 이화의료원이 서있다는 사실이 잊혀지지 않길 바란다.
해리스 의사가 일하던 진료소 벽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붙어있었다.
오직 사랑으로 우리의 하루하루를 여는 열쇠로 삼는 것
이것이 당신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