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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보구녀관을 마지막으로 지킨 의사 힐만

파일 힐만.jpg       
작성일 2025-02-07 조회수 377


18871030일 메타 하워드(Meta Howard) 의사의 진료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 보구녀관은 1914년 초까지 서울 정동에서 그 역할을 이어갔다. 27년여 정동에서의 시간동안 총 7명의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W.F.M.S.) 소속 의료 선교사들이 보구녀관을 담당했는데 보구녀관의 마지막을 함께 한 이는 아만다 프란시스 힐만(Amanda Francis Hillman) 의사였다.


힐만 의사는 이전의 선교사들과 다른 또 하나의 지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체 지원(self-supporting) 방식으로 선교지에 파견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1인당 700달러의 활동비를 W.F.M.S. 지부들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그런데 힐만은 이러한 지원없이 자비로 선교지에서의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한 것이다. W.F.M.S. 선교잡지인 Woman's Missionary Friend에서도 선교지 선교사들의 활동 비용을 기부하는 기부자들의 희생과 더불어 힐만의 선교지 자비 충당에 감사를 표한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1112월 한국에 입국한 힐만은 동대문 볼드윈진료소에서 4개월 정도를 지내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23월에 열린 W.F.M.S. 한국 연례회의를 통해 언어공부와 정동 진료소담당의 소임을 부여받아 보구녀관 근무를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보구녀관을 맡고 있던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의사는 평양 여성병원으로 발령을 받아 떠났다

보구녀관에서의 힐만 의사 활동은 그녀가 유일하게 남긴 1913년 연례보고서 중 <정동 진료소와 이화학당의 의학활동>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힐만 의사는 한국 사람들이 걸리는 질병의 대부분은 위생과 청결이 부족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많은 사람들이 건강 법칙을 몰라 죽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들에게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반 버스커크(J.D. Van Buskirk, 반복긔) 의사가 저술한 영아양육론(嬰兒養育論 The Care of Infants)을 나누어주었다.


1912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출간한 이 책은 대중들에게 의학상식을 보급하기 위해 기획된 의학시리즈 첫번째 출판물이었다. 이 책을 쓴 반 버스커크 의사는 미국 북감리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1908년 한국에 와 활동을 시작하였고 1912년부터 세브란스 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었다. 순 한글로 쓰여진 이 책은 전체 4, 13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상세한 목차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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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양육론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서부터 해야 할 것들과 아이를 키울 때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위생, 영양, 건강과 관련한 내용들을 꼼꼼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아기를 먹이는 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모유기-이유식-유아식의 단계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식이과정 속에서 어떻게 각각의 단계에서 먹이기를 해야하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또 모유를 먹어야 하는 시기에 모유를 먹지 못할 경우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인 유모를 구해 젖을 먹는 경우나 소의 젖을 먹일 경우 지켜야 할 수칙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의 어떤 베스트셀러 육아서에 뒤지지 않을 법한 수준의 내용이다.


힐만 의사는 보구녀관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진료 뿐 아니라 보구녀관과 같은 구내에 있던 이화학당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도 맡았다. 그런데 1913, 1914W.F.M.S. 한국 연례회의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이화학당 학생들이 아파서 치료를 해야하는데 동대문의 병원까지는 너무 멀어서 가기가 힘들고, 힐만 의사가 성심껏 학생들을 돌보고 있지만 이들을 잘 진료할만한 공간이 없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힐만 의사가 보구녀관에서 근무하던 시기 보구녀관의 운영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많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1912년 말, 혹은 1913년 초부터 이미 동대문의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에서 진료활동이 시작되고 난 이후 보구녀관의 진료 환경이 이전과는 달리 많이 어려워지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19136W.F.M.S. 한국 연례회의에서 힐만 의사는 계속해서 정동 진료소사역의 임무를 맡았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힐만은 최선을 다해 정동 보구녀관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했다. 1913711일자 매일신보힐만 의사가 일하는 보구병원은 1년에 3,600, 1일 약 10명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동대문에 당시로서는 최신식의 건물과 시설을 갖춘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이 운영되고 있었기에 정동 보구녀관의 역할과 위상은 축소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고 정확한 시기는 특정할 수 없지만 1913년 말에서 1914년 상반기 즈음 보구녀관은 남은 역할을 모두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으로 위임하고 정동에서의 활동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19146월 개최된 W.F.M.S. 한국 연례회의에도 보구녀관 활동 보고서는 제출되지 않았다.


보구녀관을 마지막으로 지킨 힐만 의사는 1914721일 일본 고베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탑승하였다. 힐만 의사는 한국을 떠나며 김점순이라는 7세 한국 여자아이를 입양해 데리고 갔다. 이 아이는 그녀가 한국에서 진료를 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는데 친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는 것을 보고 입양을 결심하였다. 힐만 의사와 김점순은 81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이후의 이야기는 알려진 바가 없다. 힐만 의사는 미국에 돌아와 W.F.M.S.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시카고에 머물렀다. 이후 일리노이 의학 협회(Illinois Medical Association) 회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462379세의 나이로 일리노이주 비어즈타운(Beardstown)에서 사망하였다.


2년 반 정도의 짧은 선교활동 때문인지 힐만 의사와 관련해서는 문서 기록도 적고 사진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자체 지원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한국에 와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던 보구녀관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 힐만 의사는 분명히 기억되야 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향후 그녀에 대한 기록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