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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W.F.M.S.의 후원을 받아 첫 국내파 여의사가 된 김영흥과 김해지

파일 역사.jpg       
작성일 2025-02-07 조회수 398


1900년 박에스더가 한국 여성 최초로 여의사가 되었으나 연이어 한국인 여의사가 탄생하기에는 한국의 시대상황과 여성 교육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90년대부터 한국에서 의료활동을 펼치며 여성 의료인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로제타 홀(Rosetta S. Hall)과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는 계속해서 한국인 여의사를 키워내기 위한 방도 마련에 골몰했다.


1898년부터 평양에서의 활동에 주력했던 로제타 홀은 서울 보구녀관에서 근무하던 커틀러가 1912년 평양으로 오자 광혜여원 안에 여성의학강습반’(Woman's Medical Class)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성의학강습반의 수업 만으로는 여의사를 만들 수 없었기에 로제타 홀은 당시 한국 땅에서 의사 양성 교육을 시키는 두 개의 기관-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이하 총독부 의학강습소), 세브란스 의학교-에 여학생 입학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로제타 홀의 요청에 대해 세브란스 의학교는 거절의 뜻을 밝혔으나 총독부 의학강습소에서는 여학생들을 청강생신분으로 받아주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규칙에도 1911년 규정에는 의과생도는 조선인 남자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191212월 개정된 규정을 보면 의과생도는 조선인으로 변경되어 있어서 여학생들의 입학이 규정에 어긋난 특혜는 아니었다.


1914년 광혜여원 여성의학강습반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기초 의학 공부를 하던 여학생 4명이 경성의 총독부 의학강습소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두 명은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고 나머지 두 명만이 계속 학업을 이어갔는데 이 학생이 바로 김영흥(金英興)과 김해지(金海志)이다. 이들은 모두 평양의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다. 이들이 총독부 의학강습소에 들어가기 전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평양의 기독교계 보통학교와 중등학교를 다니며 의사를 꿈을 키워 광혜여원의 여성의학강습반에 들어가 기초 의학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흥과 김해지는 로제타 홀의 추천을 받아 총독부 의학강습소에 입학한 후 의학강습소에서 제공해준 기숙사 방 하나에서 지내며 공부를 했다. 학교를 다니며 필요한 비용(생활비, 식비, 서적비, 동반 보호자 비용 등)은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W.F.M.S.)의 지원을 받았다. W.F.M.S.에서는 이후에도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공부를 하는 한국인 여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는데 김영흥과 김해지가 첫번째 수혜자였다.


이들이 총독부 의학강습소에 입학했던 19143월 의학강습소는 의사규칙에서 규정하는 의학교로 지정되어 졸업 후 무시험으로 의사면허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던 19164월 총독부 의학강습소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로 전환되며 독립적인 의학교육기관이 되었다.


매일신보1916923일자 <해부실(解剖室)의 이채(異彩)>라는 기사에서는 당시 경성의전에서 공부하고 있는 여학생들을 소개하고 있다.

 

…… 의학전문학교 제삼학년 남자 생도 이십여명 중에 여학생 3인이 섞이어있어 지금 주야로 열심 수학하여 남학생만 못하지 아니한 성적을 나타냄은 일반이 안다하지 못할지니 그 여학생의 성명을 들어 말하건데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 등의 세사람이라. …… 그 삼인은 모두 학년시험을 보지 않고 남학생의 진급함을 따라 지금은 삼학년에서 수학하게 되였는 바 모두 열심으로 연구하여 성적도 상당하다 하겠으며 제일조선은 남녀의 구별이 심하여 부인의 병에는 여자의 의사로 진찰케함이 편리한 점이 많으리라 생각하노라. ……

 

김영흥, 김해지와 함께 기사 속에 함께 언급된 안수경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 학교 교장의 추천으로 경성의전에 입학해 함께 공부를 하고 있던 학생이었고 경성의전 졸업 후 동대문부인병원에서 20년 이상 헌신하며 한국인 최초 병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1918326일 오전 10시 경성의전 강당에서 제2회 졸업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남학생 44명과 함께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 세 명의 여학생이 당당히 졸업생으로 자리를 하여 졸업장을 받았다. 한국 여성이 한국 땅 안에서 공부를 하고 의사로 탄생하는 첫번째 순간이었다.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 의사 면허를 발급받은 이들은 각자 의사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김영흥은 졸업 후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잠시 근무를 하다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활동하며 1920년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였다가 검찰에 송치되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같은 해 731일부터 83일 평양의 기성의사회가 개최한 위생강연대회에서 하기위생방법강연자로 참석하였다. 1921년 여름 로제타 홀이 인천 율목리 237번지에 인천부인병원’(현 인천기독병원)을 개원했는데, 평양에 있던 김영흥을 초빙해 인천부인병원의 운영을 맡겼다. 김영흥은 1926년까지 인천부인병원에서 근무하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개업을 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해지는 1918년 경성의전 졸업 후 바로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당시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던 커틀러 의사와 함께 광혜여원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621일 평양 남산현 예배당에서 안주군 창덕병원 원장 안창덕과 결혼하였으나 안창덕은 1926년 당시 평안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장티푸스 환자들을 진료하다 감염이 되어 319일 사망하였다. 안창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두었던 김해지는 1928년 김영흥도 근무한 바 있던 인천부인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의사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김해지가 언제까지 인천부인병원에서 진료를 이어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며 19381015일 폐업으로 의사면허를 반납한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이처럼 W.F.M.S의 지원을 받아 의사가 된 김영흥과 김해지는 의사가 된 후에도 감리교 선교회, 로제타 홀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의료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자료의 부족으로 이들의 마지막 행적까지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열악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한국인 여의사를 양성하려고 했던 로제타 홀과 커틀러의 노력, 그리고 그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자 했던 김영흥과 김해지의 의지는 이후 이 땅에서 배출되는 수많은 여의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쉽고 편한 길보다 어렵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더라도 그것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방법이라면 주저없이 나아갔던 한국 여성 의료 역사의 선각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정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