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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료역사이야기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 건립에 주축 역할을 했던 언스버거 의사

파일 릴리안.jpg       
작성일 2025-02-07 조회수 387

서울에서의 의료 사역이 발전하고 유지되기 위해 긴급히 필요한 것을 제시하며 보고서를 마치려 한다.

 (중략

2. 훌륭한 병원 건물 

(하략)”

 

이것은 1899년부터 서울 보구녀관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한 엠마 언스버거(Emma Ernsberger) 의사가 1900년에 처음으로 작성한 선교활동 보고서 내용 중 일부이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한 첫 해부터 새로운 병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선교본부에 그 뜻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뜻에 그치지 않고 동대문 언덕에 병원을 세우는 실제 성과를 거두고야 만다. 이렇듯 낯선 선교지에서 진취적인 활동을 선보인 언스버거 의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엠마 언스버거는 1862925일 미국 오하이오주 퍼트넘 카운티(Putnam County) 라이스(Rice)에서 태어나 1887년 노스웨스턴 오하이오 사범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볼티모어의 메릴랜드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의학공부를 시작하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로라 메로리얼 의과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마치고 1897년 졸업을 하였다.


언스버거 의사는 졸업과 함께 미감리교여성해외선교부(W.F.M.S.) 신시내티 지부의 임명을 받아 의료선교사가 되어 인도 파견을 명받았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도로 가기 전 이 명은 철회되었다. 이후 18995월 조선 사역에 임명되어 821일 벤쿠버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94일 요코하마에 도착한 언스버거 의사는 다시 한국행 배를 갈아타고 914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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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도착한 언스버거 의사는 커틀러 의사와 함께 보구녀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15월까지 보구녀관을 담당했던 그녀는 평양으로 활동지를 옮기는 릴리안 해리스 의사의 뒤를 이어 동대문의 볼드윈 진료소 전담 의사가 되었다. 동대문에서의 첫 1년 동안은 3,292명을 진료했으며, 그 다음 1년 동안은 4,765회의 진료를 보며 연간 100회 이상의 왕진 활동도 병행하였다. 볼드윈 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었으며 언스버거 의사는 환자들로 넘치는 대기실의 공간 문제를 해소하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수요에 최대한 대처하고자 선교회 본부에 응급실 추가 계획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공간의 부족 문제와 더불어 나무로 지어진 기와 지붕 한옥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즉 사계절 날씨 변화에 따른 건물 누수와 그로 인한 위생 문제의 지속은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짓지 않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결국 언스버거 의사는 19046월 첫번째 안식년 휴가를 받아 미국에 돌아가 새 병원 건립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미국의 여러 주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새 병원 건축 필요성에 대해 연설을 하고 직접 글로도 써서 청중들에게 전달하며 건축 기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윽고 이러한 그녀의 노력에 응답이 왔다.

 

선생님, 당신은 이 병원의 짐을 우리에게 넘겼고, 우리에게 필요성을 보여줬으니 이제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언스버거 의사의 연설에 마음이 움직인 코웬 부인(Mrs. Cowen)이라는 여성이 조선의 새로운 여성병원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 것이다. 코웬 부인 외에도 W.F.M.S. 신시내티 지부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한푼, 두푼 모아두었던 자신들의 쌈짓돈을 풀어 무려 약 8,000~9,000달러를 마련해주었다. 19057W.F.M.S.의 선교잡지 <Woman's Mission Friend>에는 언스버거 의사가 가는 곳마다 열정을 불러일으켜 병원 기금이 증가하고 있다라고 그녀의 모금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19058월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언스버거 의사는 한국의 언덕을 보며 큰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한국 여성들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자신의 어깨에 있음을 느꼈다.


언스버거 의사는 휴가에서 돌아온 후 볼드윈 진료소에서 매해 4,000여명에서 많게는 8,000명까지의 환자들을 돌보며 동대문 지역이 여성과 아동을 위한 의료선교활동을 펼치기에 최고의 입지임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07년 언스버거 의사의 노력으로 마련된 기금과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기부금 등을 바탕으로 스크랜튼 부인이 마련해둔 동대문 언덕에 새로운 현대식 시설을 갖춘 병원을 짓는 것이 결정되었다. 병원의 이름은 한국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하다 1902년 사망한 릴리안 해리스 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으로 결정되었다. 1908년부터 공사에 들어간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은 1909년 무렵 건물의 외형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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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병원이 건립되는 동안 언스버거 의사는 병원 건축을 감독하는 일과 함께 볼드윈 진료소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매진하였다. 19095월 기록을 보면 병원 신축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있으며 15,000달러 정도의 추가 비용이 요구되고 있으나 새 병원이 완공되면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 될 것이고 이 계획은 잘 마무리 될 것이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병원 건축을 위한 추가 비용이 정확히 얼마나 더 소요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1911년경 W.F.M.S. 뉴욕 지부와 노스웨스턴 지부에서 새 병원에 2,000 달러의 비용을 지급한 내용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언스버거가 모은 비용 외에도 추가 자금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05월에는 건축 중인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 옆에 감리교 남자선교회에서 지은 동대문교회가 완공되어 볼드윈 예배당에서 진행하던 선교 업무가 신축 교회 공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에 언스버거 의사는 비어 있게 된 볼드윈 예배당을 병동으로 사용하며 좀 더 개선된 환경에서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이처럼 11년동안 한국에서 의료 사역 뿐 아니라 병원 신축 공사 책임이라는 일까지 맡으며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활동을 전개했던 언스버거 의사는 병원의 건축 실무를 담당했던 감리교 선교회 남자 선교사 찰스 로버(Charles Loeber)의 건축비 횡령 문제로 인해 1910년 말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간 언스버거 의사는 1911년 선교사직을 사임했고 19351011일 오하이오주 앨런 카운티 카이로(Cairo)에서 사망, 고향인 퍼트넘 카운티의 노스 마운트 자이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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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에 와 열악한 환경에서 환자들을 성심껏 진료하는 것은 물론 당시 누구도 쉽게 추진하기 어려웠던 병원 신축을 계획하고 실현에 옮긴 언스버거 의사의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행보가 있었기에 이대동대문병원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