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료역사이야기
192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여의사들
세계화 지구촌 시대라는 21세기 지금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낯선 나라에 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큰 결심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해외 유학은 고사하고 내가 생활하는 지역 바깥의 국내 다른 지역을 가는 것도 쉽지 않았던 1920년대 한국인 여의사들 중 다수는 일본과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더 심도깊은 의학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진취적인 행보를 보였으니 김애희, 송복신, 한소제가 그들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들은 모두 평양 출신으로 김애희는 북경의 화북협화여자의학교, 송복신과 한소제는 동경의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들이 어떠한 계기로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해외로 유학까지 가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들 모두가 평양 출신이며 김애희와 송복신의 경우 북장로교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이 1903년 평양에 세운 숭의여학교를 졸업하였다. 한소제의 경우 아버지 한석진 목사가 일찍이 마펫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의 조사(助事)로 평양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다. 따라서 일찍이 딸을 가진 개신교 집안 사람들에게 여의사 만들기를 권고하였던 로제타 셔우드 홀 의사가 1900년대 초반 평양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 이들이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과 서로 연관성을 가지지 않을까 추정해 볼 수 있겠다.
1908년 숭의여학교를 1회로 졸업한 김애희는 북경에 위치한 화북협화여자의학교(North China Union Medical College for Women)로 가 의학공부를 하였다. 이 학교는 1908년 미감리교, 장로교, 공리회가 공동 설립한 학교였다. 1921년 졸업 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온 김애희는 1923년 5월 조선총독부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면허를 받았다. 평양 기홀병원 부인과 부장으로 근무하던 김애희는 1926년 2월 13일 한소제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3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획득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던 한소제는 총독부의원, 신의주 태성당의원 등에서 의료활동을 펼쳤으며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생리위생을 가르치다 김애희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나섰다.
3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김애희는 필라델피아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27년 후반경 뉴욕으로 옮겨 뉴욕 뉴저지 시티 병원에서 근무를 하였다. 그리고 미국 유학 중 뉴욕의 유학생이었던 목사 이용직과 혼인하였다. 1928년 11월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애희는 다시 평양 기홀병원으로 돌아가 환자 돌보기에 매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한편 한소제는 미국 도착 후 남편 신동기가 이미 자리를 잡고 공부하고 있던 미시간주 앨비온 대학으로 가 의학공부와 실습에 열중하였다. 이후 워싱턴 대학 의학부에서 소아과 연수를 받은 후 1929년 2월 귀국하여 남편의 고향인 전주에서 의료활동을 펼치다 1936년 12월 경성의 동대문부인병원에 신설된 경성탁아소 주치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김애희와 한소제의 경우 의사가 되고 미국에서 제2의 유학생활을 보낸 후 다시 고국에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반면 송복신은 의사가 되기 위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 줄곧 해외에서만 활동을 펼쳤다. 1922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송복신은 이듬해 미국으로 가 바버장학생으로 미시간 주립대학에 입학, 위생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1928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6월 ‘인종별의 성장차이(Difference of Growth in Different Races)’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위생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 여성 최초 박사학위 취득이었다. 송복신은 미시간 주립대학 시절 만난 미국인 윈필드 라인(Winfield Henry Line)과 혼인하였으며, 박사학위 취득 후 미시간주 공중위생국,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 미시간 주립대학 등에서 근무하며 미국에서 일생을 보냈다.
1894년 박에스더의 미국 유학으로 한국 여성의 해외 유학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 땅에서 여자가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초・중등 교육을 넘어 의사가 되기 위한 고등교육을 받고자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긴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살펴본 세 명의 여의사들은 이 수준을 또 한단계 뛰어 넘어 태평양 너머 1달 이상 배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미국에 가서 좀 더 수준높은 의술을 배우고 학문에 정진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재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도전의식은 2024년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가져다 준다. 초창기 여의사들의 이같은 진취적이고 선구적인 행보가 이화의료원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